정부가 각종 재난 사고에 대비해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지역을 지정해놓고도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집값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반발하는 주민 민원을 우려해 지방자치단체들이 내부 업무용으로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장마철을 앞두고 각종 폭우와 침수 관련 대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탁상행정에 그치고 있어 지난해 신림동 반지하 주택 침수 사고와 같은 대규모 인명피해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이달 9일 기준 각 시도별 ‘인명피해 우려지역’은 전국적으로 5412곳이 지정됐다. 장소별로는 침수취약시설(1250개소), 산사태 (1123개소), 급경사지(557개소),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440개소) 등이다. 정부는 1990년부터 인명피해 우려지역을 각 지자체가 지정해 관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지난해 신림동 일가족 사망 사건을 계기로 올해부터는 반지하 주택가와 경사지 태양광 시설도 대상에 추가됐다.
문제는 지정 유무를 지역 주민들이 제대로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경기(73곳), 서울(68곳), 부산(43곳) 등 전국적으로 반지하 주택구역 276곳이 인명피해 우려지역으로 지정돼있지만 해당 지역이 어디인지 정부와 지자체만 알 수 있다. 산·하천·해안가 등 국유지나 공공시설에는 안내 팻말이라도 붙지만 반지하와 같은 주거 지역에서는 고지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서울 자치구의 한 담당자는 “인명피해 우려지역 리스트는 내부 보고용으로만 활용하고 주민들에게 공개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인명피해 우려지역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민 반발로 적극적으로 고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이 “우리 동네 집값과 땅값에 악영향을 준다”며 반대해 대다수 지자체가 지정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법률적 근거가 없어 고지해야 할 의무가 없는 데다 지자체가 주택가 등 사유지에 정부가 적극 개입하기도 어렵다. 서울의 경우 관악산·우면산처럼 산사태 우려가 있는 거주지나 신림동 등 반지하 밀집지역이 인명피해 우려지역에 해당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행안부는 인명피해 우려지역 관리는 지자체 관할 업무여서 중앙 부처에서 적극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자체가 공무원, 이·통장, 자율방재단이 해당 지역을 관리하도록 담당자를 지정하고 위험상황 시 점검·통제·대피 업무를 수행하도록 안내할 뿐 공개를 결정하는 최종 권한은 지자체에 있다는 설명이다.
행안부의 한 관계자는 “해안가나 급경사지 등에는 안내 푯말이 붙지만 반지하가구 등 올해 추가된 지역에까지 안내문을 붙이기에는 민원 문제 등으로 한계가 있다”며 “각 시·군·구에 동사무소 전입신고자에게 침수 대비 행동요령을 알리거나 인쇄물을 거주지 우편함에 넣어놓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신림동 반지하 일가족 사망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인명피해 우려지역 고지가 적극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태풍이나 폭우 피해가 잦은 제주도와 부산시 일부 자치구들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인명피해 우려지역을 공개하고 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일본은 모든 국민들이 거주지역의 위험 요소를 알 수 있도록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색깔별로 위험성을 표시해 알리는 위험도 지도를 공개한다”며 “정부와 지자체는 위험지역 공개가 결국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적극 알리는 한편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 차수용 물막이판 지원과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