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냥 넘어가지 마요.”
현재 온 대만을 흔드는 저 말은 넷플릭스에 지난 4월 말 공개된 ‘인선지인(人選之人): 웨이브 메이커스'에 나오는 대사다. 인선지인이란 ‘선거 캠프 직원'이란 뜻. 이 드라마는 총통 선거를 준비하는 대만 정치판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대만 사회 곳곳에서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촉발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16일(현지시간) 영국 BBC·대만 타이완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이후 최소 12명의 정치인이 미투 운동에 연루됐다. 경제, 문화, 스포츠계 등으로 확대하면 현재까지 최소 90명의 유명인이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다.
전 민진당 당원 앰버 첸은 당내에서 성희롱당한 사실을 신고했지만 오히려 2차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했다. 첸은 성추행 사실 폭로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넷플릭스 드라마 '웨이브 메이커스'의 스크린숏을 게재하며 "이대로 놔두지 말자"라는 글을 올렸다.
드라마 내에서 여성 보좌관이 당내 남성 동료에게 성추행당했다고 밝혔는데 이를 접한 당 대변인이 "당에 미칠 타격을 감수하더라도 이를 놔두지 말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첸은 이 대사를 인용한 것.
이후 정치권을 비롯해 경제, 문화계 전반에 미투 운동이 번졌다.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독일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유 펀 라이는 자신이 전 타이베이 주재 폴란드 대표부 부국장에게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민진당 청년부에서 일하던 한 당원은 성추행 사실을 알리자 오히려 업무에서 배제됐다고 폭로했다.
대만 시니카 아카데미아의 류웬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전에도 성희롱과 관련된 사건은 있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다”며 “여러 업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와 성평등, 젠더 이슈를 강조해 온 민진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현지 매체 타이완 뉴스는 집권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인사들을 향한 미투 고발이 이어지면서 고위 당직자들이 잇따라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13일 전했다. 매체는 양성평등 개혁을 추진하는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당내 성 추문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고 덧붙였다.
논란이 커지자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지난 2일과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총통이자 전 민진당 대표로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며 "우리의 잘못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용감한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반성하겠다"고 적었다.
또 직장과 학교에 성평등에 관한 일련의 지침을 도입하고, 피해자가 쉽게 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등 구체적인 재발 방지 지침도 제시했다.
대만의 제1야당 국민당(KMT)도 성희롱 혐의가 제기된 한 의원에 대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강조했다.
내년 1월 예정된 차기 총통선거의 후보인 라이칭더 부총통 겸 민진당 주석도 미투 운동의 여파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립 대만 사범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판시핑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당이 양성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위주로 구축됐기 때문에 미투 고발은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더 큰 영향을 미쳤다"며 "이번 사건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라이의 인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가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현재 최선의 접근 방식은 피해자가 겪은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 동화대학교의 정치학 교수 시청펑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비록 대부분의 스캔들이 차이 총통 시절에 발생했지만 라이 부총통은 그 결과에 직면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