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가 판단한 5358만 달러(약 690억 원)는 미국계 사모펀드 운용사 엘리엇이 최초 제기한 금액 약 7억 7000만 달러(9917억 원)의 7% 수준이다. 엘리엇은 정부 개입이 손실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중재 신청 5년 만에 사실상 완패했다.
20일 법무부는 PCA의 판정 결과를 공개하며 하루 내 요지도 정리해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승소의 주요인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번 판정 결과는 사실상 정부의 압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정부가 판정부를 상대로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친 덕분으로 판단된다.
정부는 당초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것은 정부 판단과 무관한 일이기 때문에 배상 책임 또한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삼성물산의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박한 혐의로 기소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확정받으며 해당 논리는 접어야 했다. 정부가 국민연금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법원이 사실상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는 만일 국가가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은 어차피 찬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식을 직접 보유한 게 아니기 때문에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보호받지 못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법무부는 중재판정부에 제출한 서면에서 “엘리엇이 보유한 것은 주식 스와프 계약이기 때문에 한미 FTA 보호를 받지 않는다”며 “외국인투자가 보호를 어긴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 배상 책임도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 확정 판결로 한때 엘리엇에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관측도 나왔으나 엘리엇 측이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하면서 결국 우리 정부의 사실상 승소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연금 찬성표 행사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성사, 엘리엇 손실로 이어지는 고리를 연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위해 2015년 7월 열었던 임시 주주총회에서는 9202만 3660주(총 주식의 58.91%)가 찬성 의견을 냈다. 반대표를 던진 주식은 25.82%였다. 삼성물산 지분의 11.21%를 들고 있던 국민연금이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단순 계산 시 찬성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승인 과정에서 당시 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 등이 투표 찬성 압력을 행사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을 제기했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의 7.12%를 보유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합병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삼성물산 주주총회 결의를 금지해달라고 국내 법원에 가처분 신청 등을 냈지만 모두 기각된 바 있다.
정부는 앞서 론스타 판정 당시와 마찬가지로 배상 금액을 줄이고자 추가 움직임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배상금이 잘못 계산됐다며 론스타 중재판정부에 정정 신청서를 냈고 그 결과 약 6억 3000만 원이 줄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판정문 취소 신청 등 불복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론스타와 ISDS 사건에서 정정 신청으로 6억여 원의 배상 금액을 줄인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로서는 사실상 승소했으나 실제 배상 금액을 줄일 수 있는 ‘길’이 있는 만큼 혈세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추가로 추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론스타에 이은 엘리엇 ISDS 판결까지 승소라는 결과물을 가져왔으나 우리 정부가 방심하면 안 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된 ISDS는 총 10건으로 이 가운데 이번 엘리엇 사건을 포함해 5건은 종료됐으나 5건은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앞선 승소 사례를 참고해 우리 정부가 ISDS에 한층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 법조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