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이 12일 신한울 원자력발전소 3·4호기의 부지 터 닦기 공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신한울 3·4호기 원전의 핵심 기기인 원자로 제작 착수식이 지난달 두산에너빌리티 경남 창원 공장에서 열렸다. 신한울 3·4호기는 2017년 발전 사업 허가를 받았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그해 말 공사가 중단됐다. 6년 만의 사업 재개에 대해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원전 생태계의 완전 정상화”라고 평가했다.
신한울 3·4호기를 비롯한 원전이 더 지어지고 더 가동될수록 우리나라의 에너지 사정은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쌓이는 사용후핵연료도 많아질 것이다. 문제는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해 놓을 공간이 계속 줄어 조만간 한계에 이른다는 점이다.
원전의 땔감인 핵연료는 원자로에서 3~5년간 핵분열을 하며 연소돼 할 일을 마치면 사용후핵연료가 된다. 사용후핵연료는 습식저장시설에서 열과 방사선량이 줄어들 때까지 10년 정도 보관한다. 이후 공기 대류에 의한 자연 냉각으로도 식힐 수 있을 때가 되면 건식저장시설로 옮겨 40~60년 저장한다. 건식 저장은 습식 저장에 비해 장기 관리가 가능하며 비용 측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 그다음에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영구처분장에 묻는다.
현재 국내에는 한빛(6기), 한울(7기), 월성(3기), 신월성(2기), 새울(2기), 고리(5기) 등 6곳에 25기의 원전이 운영 중이다. 모든 원전은 자체적으로 습식저장시설을 갖추고 있어 사용후핵연료를 넣어둘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건식저장시설이다. 월성 원전 외에는 어디에도 건식저장시설이 없다.
월성 원전은 나머지 원전이 경수로 방식인 것과 달리 중수로 방식이어서 사용후핵연료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온다. 원전의 운영을 담당하는 한수원은 이를 소화하기 위해 1992년부터 건식저장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 지은 원통형 캐니스터(사일로)는 2010년 16만 2000다발의 용량이 모두 찼다. 이후 조밀건식저장시설인 맥스터 7기에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용량이 다 돼 지난해 3월 추가로 7기를 완공했다.
국내 모든 원전의 습식저장시설에는 사용후핵연료가 계속 쌓이고 있다. 특히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에서 보듯 앞으로 원전이 늘어나면 사용후핵연료는 그만큼 더 많이 생긴다. 습식저장시설의 포화 시기가 문재인 정부 때 계산한 것보다 앞당겨진다는 얘기다.
정부가 2월 공개한 사용후핵연료 포화 시점 재산정 결과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에 한계에 도달하는 곳은 한빛 원전이다. 애초 2031년에서 2030년으로 1년 당겨졌다. 이어 한울 원전이 2032년에서 2031년으로, 신월성 원전이 2044년에서 2042년으로 빨라졌다. 새울 원전은 기존대로 2066년 포화가 예상된다. 고리 원전은 원래 고리 2호기의 영구 정지를 가정해 조밀저장대 설치를 검토하지 않았다. 고리 2호기의 수명 연장이 결정된 만큼 조밀저장대를 마련하면 포화 시점은 2032년으로 1년 늦춰진다.
건식저장시설을 짓는 데는 7년 정도 걸린다. 습식저장시설의 포화 시기를 고려하면 지금 당장 서둘러도 늦은 감이 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원전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원전 내에 들어서는 건식저장시설이 영구처분장화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한수원은 2월 이사회를 열어 고리 원전 부지에 사용후핵연료 2880다발 이상을 저장할 수 있는 건식저장시설 건설을 의결했다. 부산·울산 탈핵 단체 등으로 구성된 고리2호기수명연장·핵폐기장반대범시민운동본부는 반대 운동에 나섰다. 한수원은 고리 원전 내에 임시저장시설을 만들어 저장한 다음 다른 부지에 중앙집중식 중간저장시설이 조성되면 그곳으로 옮기기 때문에 영구처분장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운동본부 측 관계자는 “부지 확보도 못한 중간저장시설이 언제 만들어질지 알 수 없다”며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한빛 원전이 들어선 전남 영광군 주민들은 4월 ‘고준위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 설치 반대 영광군민 규탄 대회’를 열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같은 이유로 임시저장시설이 결국 영구처분장이 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건식저장시설은 원전 부지 내에 들어서는 임시저장시설과 원전 부지 바깥의 다른 장소에 지어질 중앙집중식 중간저장시설로 나뉜다. 현재 원전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임시저장시설이다. 이들은 중간저장시설이나 영구처분장 계획이 없기 때문에 임시저장시설이 결국 영구처분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과 관련한 특별법이 있어야 한다. 특별법에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언제까지 짓고 그때 임시저장시설에 저장된 사용후핵연료를 반드시 빼내겠다는 것을 명확히 해놓으면 주민들은 비로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특별법이 있어야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지을 부지도 해당 지역 주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가며 확보할 수 있다.
현재 국회에는 김영식·이인선 국민의힘 의원과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발의한 3개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안이 계류돼 있다.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은 같은 말이다. 특별법에서 사용후핵연료를 땅 깊은 곳에 묻기로 처분하면 그때부터 사용후핵연료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된다.
여야 안의 가장 큰 차이는 저장시설의 용량이다. 여당 안은 임시저장시설의 용량을 ‘원전의 운영 기간 또는 운영 허가를 받은 기간 내 발생량’으로 정의했다. 원전의 수명을 연장해 운영 기간이 더 늘어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야당 안은 ‘원전의 설계수명 기간 내 발생량’으로 한정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맞춰 설계수명이 끝나면 저장시설 용량도 늘릴 수 없도록 했다. 김영식 의원실 관계자는 “그동안 야당 측과 몇 번에 걸쳐 대화했지만 저장 용량 등에서 견해차가 커 합의하지 못했다”며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 등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이달 내에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달이 지나면 의원들은 자신의 공천 여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구에서 표를 얻기 위한 물밑 작업에 돌입한다. 따라서 이달 안에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돼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늦어지면 최악의 경우 원전이 가동을 멈출 수도 있다. 강문자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회장은 “원전의 가동을 중지하거나 그것이 싫다면 지금 주민 반대를 무릅쓰고 임시저장시설 건설을 밀어붙이거나 해야 된다”며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국회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구처분장은 장기 과제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특별법안에는 2050년 운영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영구처분장은 땅 밑 500m 정도 되는 지점에 설치해 최소 1만 년 이상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시설이다. 외국은 원전을 건설함과 동시에 영구 처분과 관련한 연구를 병행했다. 핀란드의 경우 수도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250㎞ 떨어진 해안에 땅을 파 화강암 지층 450m 아래에 건설한 영구처분장을 2025년께 운영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첫 원전을 지은 지 19년이 지난 1997년에 연구를 시작했다. 현재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 내 지하 120m 정도에 지은 연구용 처분 시설이 전부다. 임시저장시설도 짓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갈 길이 멀다.
영구처분장 연구를 담당하는 김경수 사용후핵연료관리핵심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영구처분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동의가 필수”라며 “국내 연안 해저 암반에 영구처분장을 짓는 방안 등 주민 수용성 제고를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