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골프 대회 역사상 가장 큰 우승 상금 5억 원의 주인공은 한승수(37·하나금융그룹)다. 선수들 모두가 혀를 내두른 ‘지옥 코스’에서 잊혔던 천재성을 끄집어내 골프 인생의 또 다른 전기를 열어젖혔다. 10대 시절 미국에서 타이거 우즈 버금가는 신동으로 이름 날렸던 한승수다.
재미동포 한승수는 25일 충남 천안의 우정힐스CC(파71)에서 끝난 코오롱 제65회 한국오픈(총상금 14억 원)에서 최종 합계 6언더파 278타로 우승했다. 유일한 언더파 스코어이고 이븐파 2위 강경남과도 무려 6타 차. 2017년 일본 투어 카시오월드 오픈 우승과 2020년 KPGA 투어 LG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이 있는 한승수는 2년 7개월 만에 KPGA 투어 통산 2승째를 달성했다.
대회 이름에 ‘한국’이 들어가는 영예로운 내셔널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5억 상금과 함께 KPGA 투어 5년 시드, 다음 달 영국에서 열리는 제151회 디 오픈 출전권까지 받아 들었다. 올 시즌 상금 23위에서 단숨에 넉넉한 상금 1위(6억 2300만 원)로 뛰어올라 가장 강력한 상금왕 후보가 됐다. 5억은 한승수가 2021시즌부터 올해까지 3년 간 번 상금(약 4억 5800만 원)보다도 많은 돈이다.
그의 우승이 더욱 빛나는 것은 한국오픈 역사상 네 번째인 드문 기록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매 라운드 선두로 마치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은 한국오픈 사상 열세 번째인데 그중에서도 매 라운드 단독 선두는 네 번째다. 1987년 이강선 이후 36년 만에 한승수가 네 번째 주인공이 됐다.
2라운드에 3타 차 선두였던 한승수는 3라운드에 마지막 홀 보기 탓에 1타 차까지 추격 당했다. 압박이 심할 만했지만 그는 이날 4라운드에 버디와 보기 4개씩으로 타수를 잃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경기력으로 압도적인 우승을 완성했다.
올해 우정힐스는 그야말로 지옥 코스였다. 페어웨이 폭이 좁은 곳은 8m밖에 안 됐고 러프 길이는 보통 100㎜에 더 깊은 곳은 200㎜도 넘었다. 버디 수 비교보다 더블 보기나 그보다 더 안 좋은 점수를 몇 개로 막느냐로 순위를 가리는 대회였다. 한승수는 나흘 간 72홀 동안 더블 보기가 단 1개였다. 티샷이 페어웨이를 벗어나더라도 그리 길지 않은 러프로 보내고 그린 주변에서는 최대한 홀에 붙인 덕분이다.
175㎝의 크지 않은 키로도 평균 드라이버 샷 297야드를 날리는 한승수는 특히 그린 적중 때 퍼트 수 1.79개 등 퍼트 지표에서 두드러지는 선수다. 그린을 놓쳐도 파나 그보다 좋은 점수를 적는 리커버리율 부문에서 지난해 전체 7위였고 올해도 상위권을 지킨다. 한마디로 홀에 가까워질수록, 위기가 닥칠수록 강한 스타일이다. 이런 자신의 강점을 난코스에서 최대의 무기로 삼아 십분 활용했다.
4번(파3)과 8번 홀(파5)이 결정적이었다. 이언 스나이먼(남아공)에게 2타 차로 쫓기던 4번 홀. 185야드 거리의 티샷을 한승수는 핀 왼쪽으로 보냈다. 핀이 구석에 딱 붙어있어 그린 왼 편의 물과 핀 사이에 공간이 별로 없는 홀이었다. 한승수의 과감한 티샷은 그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핀 2.7m 거리에 떨어졌다. 침착한 버디로 3타 차로 달아났다.
8번 홀에서는 10m쯤 되는 먼 버디 퍼트가 홀로 빨려 들어 반 바퀴를 빙글 돌며 들어갔다. 이 퍼트로 2위 이정환을 4타 차로 떨어뜨리면서 한승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반 9홀에 들어가며 이미 타수 차는 5타까지 벌어졌다. 3번 홀(파4) 보기 뒤 두 홀 연속 버디, 7번 홀(파3) 보기 후 다음 홀에서 바로 버디를 잡으면서 한승수는 추격자들에게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최대 위기는 15번 홀(파4)이었다. 티샷이 왼쪽으로 휘어 숲으로 들어가 트러블 샷 상황을 맞았다. 한꺼번에 두세 타를 잃을지도 몰랐다. 한승수는 그러나 허리 높이보다도 높은 풀들 사이의 공을 기가 막히게 잘 걷어냈다. 3온에 성공했고 먼 거리 파 퍼트마저 넣어 타수를 지켜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 간 한승수는 2001년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최연소 본선 진출 기록(14세 8개월)을 쓰면서 주목 받았다. 2002년에는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주관 5개 대회 우승으로 우즈의 10대 시절 기록을 깨기도 했다. 고교 시절인 17세에 PGA 투어 대회에 초청 선수로 나갈 만큼 전도유망했다. 그러나 아마추어 시절의 기세는 프로 전향 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PGA 2부 투어 등을 전전하다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KPGA 투어를 뛰었다. 한승수는 “15번 홀 두 번째 샷 때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할지, 그냥 칠지 끝까지 고민하다가 그냥 쳤는데 운 좋게 잘 빠져나갔다. 우승 사실이 아직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치열한 준우승 경쟁에서는 강경남이 이겼다. 공동 2위였다가 마지막 홀 버디로 단독 2위가 됐다. 상금 1억 2000만 원과 디 오픈 출전권을 가져갔다. KPGA 선수권 우승자 최승빈이 데일리 베스트인 3언더파를 쳐 합계 1오버파 3위에 올랐다. 1타 차 2위로 출발한 이재경은 허리 통증 탓에 더블 보기 2개 등으로 7타나 잃어 2오버파 공동 4위로 내려갔다. 디펜딩 챔피언 김민규도 4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