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에 라면·제빵 등 식품업체들이 줄줄이 제품 가격을 내리면서 유가공업체들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당장 8월부터 원유 공급가가 인상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소비자단체는 “그간 원유가 상승률 이상으로 과도하게 흰 우유 제품 가격을 인상해왔다”며 가격 인상 자제를 촉구했다. 2026년부터는 미국과 유럽산 유제품에 대한 관세가 전면 철폐될 예정이어서, 저출산 기조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할 유가공업체에 비상이 걸렸다.
낙농진흥회 원유가 8월부터 69~104원 올릴 듯
1일 낙농업계에 따르면 낙농진흥회는 이달 9일부터 소위원회를 열어 젖소에서 짠 원유 1L당 가격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낙농가와 유가공업체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낙농진흥회는 낙농진흥법에 따라 매년 원유의 수급 계획을 수립하고 가격을 결정한다. 통상 소위원회가 가격을 정하면 낙농진흥회 이사회 의결을 거쳐 8월 1일부터 인상분이 반영된다.
현재로서는 낙농가의 생산비 상승에 따라 원유 가격 인상이 유력한 상황으로, 원유 L당 69∼104원 범위의 인상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낙농진흥회가 가격을 올릴 때마다 유가공업체들의 널뛰기 가격 인상이 이어지지면서 논란이 됐었다. 낙농진흥회는 2018년 1L당 원유 가격을 922원에서 926원으로 4원 올렸고, 이어 2021년 21원을 인상해 947원으로 책정했다. 당시 원유 가격이 21원 오르자 업계 1위인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우유 제품 가격을 평균 5.4% 인상해, 흰 우유 1L 제품 가격을 2500원대에서 2700원대로 올렸다. 매일유업(267980)과 남양유업(003920)도 뒤따라 우유 제품 가격을 4~5% 인상했다.
지난해에는 원유가가 52원 인상됐다. 그러자 서울우유는 2710원이었던 흰 우유 1L 가격을 6.6% 올려 2890원으로 책정했다. 매일유업과 남양유업 역시 흰 우유 900㎖ 가격을 각각 2610원에서 2860원(9.6%↑), 2650원에서 2880원(8.7%↑)으로 인상했다.
정부 압박에 ‘라면·제과·제빵’업계 가격 인하 릴레이
하지만 올해는 원유가 인상에도 유가공업체들이 가격을 쉽사리 올리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에 라면·제과·제빵 등 식품업체들이 줄줄이 백기를 들면서다. 농심은 주요 제품인 신라면과 새우깡 가격을 각각 50원, 100원 인하했고 SPC도 파리바게뜨와 편의점·마트에서 판매하는 주요 빵 제품에 대해 가격을 100~200원가량 내렸다. 식품업계는 이들 기업들의 가격 인하 릴레이가 각 업계로 불똥 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앞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8일 라면업체들을 겨냥하며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6일 제분업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밀 가격 인하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제분은 30일 밀가루 제품 가격을 평균 6.4% 내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밀크플레이션’ 우려…소비자단체 압박도
이런 가운데 소비자단체가 유가공업체를 직접 겨냥해 가격을 올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30일 설명을 내고 유가공업체들이 그동안 과도하게 제품 가격을 올렸다며 인상 자제를 촉구했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우유 제품은 물론 우유가 함유된 빵, 과자 등의 제품 가격이 연이어 올라 이른바 ‘밀크플레이션’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협의회는 우유 가격의 인상률이 원유 가격 인상률보다 크게 웃돌고 있다고 지적했다. 협의회는 올해 1분기 원유가 상승률이 4.1%를 기록했지만, 서울우유와, 남양유업, 매일유업은 흰 우유 출고가를 각각 5.5%, 9.9%, 7.7% 올렸다고 지적했다. 협의회는 “특히 지난해부터 올해 1분기까지 10.2∼16.3% 사이의 큰 폭의 가격 인상을 단행해 소비자가 느끼는 가격 상승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원유가가 오를 때마다 우유 가격을 올리는 해당 업체들이 가격 인상 원인은 낙농가에, 원유가 상승 부담은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산 우유 관세 2025년 2.4%, 2026년엔 0%
설상가상으로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유제품이 순차적인 관세 철폐 단계를 밟고 있어 이들업체들의 속내는 더욱 착잡하다. 미국산 유제품은 관세율이 지난해 9.6%, 올해 7.2% 이지만, 2025년 2.4%로 낮아진다. 2026년부터는 0%다. 유럽산 유제품도 올해 9.0%인 관세가 순차적으로 낮아져 2026년부터는 전면 개방될 예정이다.
이미 가공유 수입량은 급증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내 유제품 총수입량은 2019년 95만 8400t(톤)에서 지난해 153만 4900t까지 늘었다. 상온에서 보관 가능한 멸균우유 등은 유통기한이 긴 데다 국산 우유보다 저렴하다. 특히 폴란드 등 유럽 멸균우유는 관세가 붙어도 1L에 1500원으로 국산 우유의 반값에 그친다.
남양유업은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700억 원대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매일유업은 2018~2021년 5~6%대의 영업이익률을 보이다 지난해 3%로 내려앉았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음용유(마시는 우유) 소비량은 175만t 수준으로 낙농진흥회의 쿼터량인 222만t을 크게 웃돈다. 50만t가량이 공급 과잉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유가공업체들은 원유를 생산비에 연동된 고정 가격제로 비싸게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저출산 기조에 우유 소비량이 줄면서 이들업체들은 건강기능식품, 단백질 제품, 외식업 등으로 사업 다각화에 나섰지만 기존 사업을 대체하기에는 아직 규모가 한참 못 미친다. 유가공업체들의 주판알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