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을 지배하는 동일인(총수) 지정 기준을 마련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로 했습니다. 공정위가 1986년 대기업집단 제도를 도입한 이후 그 출발점인 동일인 지정 기준을 명문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이 기준에 따라 “김범석 쿠팡Inc 의장이 총수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김 의장이 총수로 지정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일인 지정’, 조금 더 명확하게=공정위는 ‘동일인 판단 기준 및 확인 절차에 관한 지침’ 제정안을 마련해 30일부터 행정 예고에 들어간다고 29일 밝혔습니다. 동일인은 공정위가 대기업집단에 각종 의무를 부과하는 기준점입니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4촌 이내 친족의 사업 현황과 주식 보유 현황 등을 매년 공정위에 보고해야 합니다. 공정위는 이를 근거로 일감 몰아주기와 내부거래 등을 규제합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동일인 지정 관련 명문화된 규정이 없어 공정위의 자의적인 지정이 이뤄졌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동일인을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해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이번 제정안의 핵심입니다. 공정위는 동일인의 판단 기준으로 △기업집단 최상단 회사의 최다 출자자인지 △기업집단의 최고 직위자인지 △기업집단의 경영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기업집단 내·외부적으로 대표자로 인식되는지 △동일인 승계 방침에 따라 기업집단의 동일인으로 결정됐는지 등 다섯 가지를 종합 고려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경영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라는 요건입니다. 대표이사 등 임원의 임면, 조직 변경, 신규 사업투자 등 주요 의사결정이나 업무 집행을 주도하거나, 보고받고 승인하는지가 기준이 됩니다. 법인 등기에 등재된 직함이 ‘회장’, ‘이사회 의장’ 등이 아니더라도 기업집단 내 상위 직위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최고 직위자로 볼 수 있습니다.
공정위는 각 기준에 해당하는 자연인이 누구인지 고려하되 각 기준에 해당하는 자가 다를 경우 다섯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기준에 부합하는 적절한 자연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기업집단의 국내 최상단 회사 또는 비영리법인이 동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포스코와 KT 등 기업집단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공정위가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준을 명문화했지만 기업의 불확실성이 말끔히 해소된 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 위원장은 “다양한 형태의 지배구조가 등장하고 있고 동일인 지정 관련 변수가 복잡·다양해져 5개 기준을 균형 있게 살펴봐야 한다”며 “결정적인 하나의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번 지침을 통해 모호성이 완전히 해소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쿠팡 김범석, 총수 해당”한다더니=한 위원장은 이번 기준을 발표하면서 쿠팡의 김 의장이 동일인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김 의장이 △기업집단 최상단회사의 최다출자자 △기업집단 경영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 △기업집단 내·외부적으로 대표자로 인식되는 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외국계 기업에 대해 공정위는 보통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고 쿠팡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돼 왔지만 그 판단이 맞지 않는다고 자인한 셈입니다.
문제는 김 의장으로 동일인으로 지정했을 때 통상 마찰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대주주인 에쓰오일의 경우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놓고 미국 회사인 쿠팡의 경우 개인인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최혜국 대우 조항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공정위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와 협의해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외국인 동일인 지정 기준’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한 위원장은 “이번에 제정된 기준에 따르면 쿠팡의 김 의장은 동일인으로 볼 만한 실체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다”면서도 “통상 이슈 때문에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못했던 만큼 합리적인 방안을 잘 모색해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정위는 2021년부터 실무적으로 운영해오던 ‘동일인 확인 절차’ 또한 명문화했습니다. 기업이 동일인 변경을 원할 경우 이 절차를 통해 변경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기업이 의사를 표명하지 않더라도 공정위가 동일인 변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직권으로 협의 절차를 개시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의 동일인 확인 결과에 이의가 있는 기업은 공정위에 재협의(이의 제기)를 요청할 수 있도록 근거 규정도 마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