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누적 영업손실 45조 5000억 원을 정상화하기도 버거운데 이번에는 사법 리스크에 노출된 한국전력공사의 얘기다. 지난달 광주지법이 하청 업체 근로자를 한전 직원으로 인정하는 판단을 내린 데 따른 후폭풍이 한전에 몰아치고 있어서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하루빨리 불법 파견을 멈추고 직원을 직고용하라”고 공개 압박하는 데다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은 최대 10년치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후속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원고소가는 단순 계산 시 최소 87억 원(145명×1인당 연간 2000만 원×3년), 많게는 290억 원(145명×1인당 연간 2000만 원×10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3일 국회와 에너지 업계 등에 따르면 한전은 이날 경영회의를 열고 ‘JBC(옛 전우실업) 근로자 145명을 직고용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19일 판결문을 수령한 지 꼭 2주 만이다.
한전의 한 관계자는 “(JBC 근로자 직고용 건은) 아주 민감한 사안인 데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이라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야당은 이번 이슈를 정치화하고 있다. 최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한전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소송으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건 배임 행위”라며 “재고의 여지가 없는 만큼 항소를 포기하고 재판 결과를 수용하라”고 종용했다. 소송비가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만큼 접으라는 것이다.
한전으로서는 이 소송만으로도 골치인데 또 다른 소송이 대기하고 있다. 발전노조가 수백억 원대 임금 차액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원청인 한전 직원이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에서 하청인 JBC 직원으로서 실제로 받은 임금의 차액을 손해배상 명목으로 지급해달라는 요구다. 이를 위해 발전노조 측은 근로자지위소송에 참여한 직원별 근속연수와 급여 수준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직급에 따른 차이가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한 사람마다 1년에 2000만 원을 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손해배상 산정 기간은 근로자지위소송을 제기한 2020년 이후 3년여이며 최근 대법원에서 선고한 삼표시멘트 사례에 비춰 10년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결국 법원이 한전 소속으로 인정한 45명에 한전이 고용의사를 표시하라고 한 100명을 더한 총 145명 모두 임금 차액 소송에 참여한다면 100억~300억 원에 육박하는 고액 사건으로 비화하게 된다. 한전 측은 “임금 차액 소송 건은 소장을 송달받는 대로 별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일은 한전이 1990년대 후반 퇴직자단체인 한전전우회가 설립한 전우실업에 도서지역 발전소 운영권을 몰아주면서 시작됐다. 육지의 발전소로부터 송배전을 받기 어려운 섬 지역은 지방자치단체나 주민이 자가발전시설을 운영해 전력을 생산해오다가 한전이 이를 인수한 뒤 JBC에 수의계약으로 운영을 맡겨왔다. 문제는 JBC가 한전의 인력 공급소이자 한전전우회의 화수분이었다는 점이다. 박영순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JBC는 전체 임원 10명 중 8명이 한전 출신이었고 한전전우회는 JBC로부터 연평균 15억 원 이상을 배당받았다.
이에 원고 측은 ‘도급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근로자파견계약에 해당한다’며 파견법에 따라 2년 넘게 일한 JBC 직원들은 한전이 직고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소장을 2020년 3월 광주지법에 제출했다. 그러나 한전 측은 “도급인으로서 지시 이외에 사용자의 지위에서 지휘·명령을 한 적 없다”며 맞섰다.
재판부는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한전 직원이 JBC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하거나 한전 지사장이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을 통해 JBC 직원들로부터 일일 보고를 받는 등의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1심 법원은 “한전이 하청 노동자에게 업무 처리 지침과 함께 교육·훈련을 제공했고 공문·전화 등으로 구체적인 업무를 지시했다”며 “각 노동자도 일일 보고서를 작성해 한전에 보고하는 등 한전 사규를 준수할 의무가 있었고 취업 규칙에 따라 한전 창립기념일에 유급휴일을 받기도 했다”고 판시했다.
한편 국무조정실도 한전과 JBC 사이 27년간의 수의계약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국조실은 이날 공개한 전력산업기반기금사업 2차 점검 결과에서 “위탁이 불가능하며 직접 수행해야 하는 핵심 업무와 무등록 업무까지 일괄 수의계약으로 떠넘기고 이를 감사원에 통지하지 않는 등 (한전의) 법령 위반 사항을 적발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