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생활

[여명]"소영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K콘텐츠의 저력은 스토리텔링의 힘

“행복하자” “파이팅” 한마디에 감동

치유·위로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

때로는 힘겨운 현실 탓인가 싶기도





불 꺼진 방, 소영(이지은 분)이 말한다. “해진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상현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동수, 태어나줘서 고마워.” “우성아, 태어나줘서…고마워.” 그리고 해진이 말한다. “소영아, 소영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



수원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됐다는 소름 끼치는 뉴스를 듣고 나서 지난해 여름 관람했던 영화 ‘브로커’를 다시 봤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관계의 따뜻함이 느껴지고 그 속에서 극중 인물들과 관객들 모두 위로받으며 치유되기 때문이다. 배우 송강호에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는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에게 상현(송강호 분)이 전하는 한마디로 시작한다. “우성아, 우리랑 이제 행복해지자꾸나.”

어두운 골목길. 중년의 사내 동훈(이선균 분)이 비틀거리며 걷다가 무너질듯 주저앉아 흐느낀다. 그러다 몸을 추스려 일어나면서 주먹을 쥐고 한마디를 뱉어낸다. “파이팅” 안 본 아저씨는 있어도 한 번만 본 아저씨는 없다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그 골목길 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의 드라마를 많은 사람들이 최애로 꼽는 이유 역시 치유라고 생각한다. 상처투성이의 인물들이 서로 담담히 위로하고 응원하면서 편안함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저마다 다른 화해나 용서, 희망 등을 품지 않았을까. “이제 진짜 행복하자”는 동훈에게 지안(이지은 분)은 “파이팅”으로 끝인사를 전한다.



K콘텐츠의 경쟁력은 모두가 인정하듯이 스토리의 힘에서 나온다. 얼마 전 방한했던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 역시 “한국은 대단한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는 나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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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K콘텐츠의 무궁무진한 스토리 중에서도 가슴 따뜻한, 조용히 위로하는 이야기에 크게 감동하는 편이다. 악당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쾌감보다 대사 한 줄에 행복해지는 기분을 더 즐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혜자(김혜자 분)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딸이었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드라마 ‘눈이 부시게’)

엄마의 당부같은 한마디에 눈물을 왈칵 쏟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이런 힐링 드라마가 공상과학(SF)물보다도 판타지일 수 있다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싶다는 욕구에 장밋빛 가상의 세계를 엿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우리를 힘겹게 하는 뉴스는 연일 이어진다. 출생신고가 안 된 아기들이 최근 8년간 2200여 명이나 된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 참담했고 10여 년을 미적거렸던 ‘출생통보제’는 이제야 국회를 통과했다. 의원들이 내건 현수막을 볼 때마다 돈 봉투와 막말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고 그런 와중에 전 야당 대표의 보좌관이었던 사람은 구속됐다. 과학과 괴담 사이 갈팡질팡했던 주부는 결국 천일염 한 가마니를 2배 넘는 가격에 사버린 후 허탈해진다. 킬러 문항이 사라지면 ‘공정 수능’이 되는 것인지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답답해하고 당장 넉 달 후 수학능력시험을 치러야 하는 고3과 재수생들은 막막해진다.

무한 반복되는 이런 일상 속에서 때로는 드라마를 보며 진심 어린 위로를 받고 때로는 극장에 앉아 새로운 희망도 품는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선아(신민아 분)는 오래전 생을 마감한 아빠를 떠올리며 말한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는 게 힘들었겠다…힘들다고 말해주지, 그러면 내가 안아라도 줬을 텐데.”

그리고 작가 노희경은 마지막 장면에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박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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