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 추상회화의 역사는 내적 투쟁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거장 작가들이 서구 작가 세계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한국적이면서도 서구적인 작품 세계 구축을 위해 애썼다. 때문에 한국 추상회화는 서양의 논리에 단순히 빗대어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의 추상 표현은 이와 다르다. 한국적·서구적인 구분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젊은 작가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한국 추상회화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다. 본관에서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고 작가 이상욱을 재조명하는 회고전 ‘더 센터너리(The Centenary)’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1970년대부터 작가의 말년까지 제작된 주요 작품 48점을 선보인다. 학고재는 이미 지난해 1월 ‘에이도스를 찾아서: 한국 추상화가 7인’ 기획 전시에서 한국적 서정 추상주의를 개척한 대표 작가로 이상욱을 소개했다.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된 이번 개인전은 소란스럽지 않고 묵직하게 작가의 추상 세계를 온전히 보여준다.
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된 바 있는 그의 작품은 ‘서체의 추상’과 ‘서정의 추상'으로 구분된다. 다만 이런 양식이 특정 시기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골고루 드러난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함흥으로 주로 ‘고향 상실’의 아픔을 여러 겹의 붓자국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이상욱은 작품 표면에 물감 등으로 재질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정적인 추상에 도달했다”며 “겹겹이 쌓인 물감의 표현은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만큼 두텁게 처리됐다”고 설명했다. 1970년에 이후에는 ‘서체의 추상 ’표현을 보여준다. 작품은 마치 동양화처럼 거침없이 하나의 획으로 내려 긋고 또 다른 획을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평소 ‘추사가 내 선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추사 김정희의 서체와 정서, 사상 등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물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본관을 나서 학고재 신관에 들어서면 김세은(34)과 유리(29)의 2인전이 펼쳐진다. 학고재가 2030 작가 두 명을 위해 별관 전체를 사용해 전시를 연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이상욱과 두 신진 작가의 이름을 나란히 해 전시를 여는 것은 그만큼 김세은·유리의 현재의 인기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다.
두 MZ세대 작가 전시는 세대에 걸맞게 다채롭고 현재적인 풍성한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김세은은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에서 터널을 통과하며 마주하는 풍경을 붓 터치로 표현한다. 마치 터널을 지나갈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 풍경을 보고 있는 듯 캔버스에서 ‘속도’가 느껴진다. 그밖에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소재는 카레이싱, 도심의 파괴 등으로 다채롭다. 유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화로 전시를 꾸렸다. 작품 속 인물이 무엇을 하고 있든 그의 얼굴은 모자이크처럼 흐릿하게 처리했다. 작가는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며 “언어의 불완전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작품을 설명한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