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4년 중임제, 국무총리 국회 복수 추천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이상 3개 항에 국한해 헌법을 개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17일 제헌철 경축사에서 개헌을 촉구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있던 이래 크게 바뀐 사회상을 반영하려면 헌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펴는 의회주의가 심각히 훼손됐다는 점도 김 의장이 개헌론에 힘을 실은 이유로 꼽힌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약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국회는 공전을 거듭해왔다. 국내외에서 복합위기가 끊임없이 닥치는데 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다 보니 국가 차원의 총력 대응은 힘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국회를 우회해 시행령 개정 방식으로 임기응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다시 야당의 반발을 사고 정부·국회의 엇박자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의 시행령 개정에 제약을 가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극한 대립의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개헌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제헌절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제헌절 당시 열린우리당 출신의 임채정 국회의장이 “1987년 헌법의 정치적 역할은 이미 완수됐다”며 헌법의 개정 방향을 연구하기 위한 헌법연구조사위원회 구성을 역설한 이후 제헌절의 개헌론은 수시로 거론됐다. 2016년 이후 올해까지 총 18회의 제헌절 축사 가운데 다섯 번을 제외한 13번의 축사에서 모두 개헌론이 담겼을 정도다. 해당 기간 양당에서 배출된 9명의 국회의장들이 모두 임기 중 최소한 한 번씩은 헌법 수정을 공론화한 것이다. 여야 갈등의 정치를 극복하고 협치와 분권·국민통합 등을 이루자는 취지였다.
안타깝게도 역대 의장들이 주창했던 개헌은 물론이고 협치와 분권·국민통합은 여전히 묘연하다. 제1야당은 여야 간 협의나 사회적 합의가 마무리되지 않은 쟁점 법안들을 과반의석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여당은 야권을 포용하며 절충과 협상으로 정국 경색을 풀어내지 못한 채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등에 기대거나 상임위원회 회의를 보이콧하는 등의 방식으로 야당에 맞불을 놓고 있다. 야당은 다시 이에 반발해 상임위 진행을 파행시키는가 하면 장외투쟁도 불사하고 있다. 2019년 당시 제헌절 축사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두 전직 대통령은 ‘싸워도 국회에서 싸워야 한다’는 의회주의 신념을 평생을 통해 보여주셨다”고 되짚어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장외투쟁과 국회 공전을 마다하지 않는 현재의 우리 정치는 양 김 대통령 시절보다 선진화됐다고 보기 어렵다.
과연 이 같은 정치 불안이 개헌으로 풀릴 수 있을까. 현실 정당에 몸담고 있는 정치인들이나 실무자들을 만나보면 정당 개혁 없는 개헌은 사상누각일 뿐이며 정당 스스로 쇄신을 먼저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의원들이 개개인이 독립적인 헌법기관·입법권자로서 소명을 버리고 계파정치·팬덤정치에 편승한다면 헌법이나 선거법이 바뀌어도 분열의 정치가 바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헌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건강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여야가 각자 정당을 쇄신하는 것이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계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실력과 인망으로 선거에 도전할 수 있도록 공정·투명한 공천 시스템을 구현하는 게 급선무다. 선거 시즌이 아닌 평상시에도 지속적으로 유능한 신인을 발굴하고 리더십·토론훈련과 정책 연구를 활성화하는 정치인 육성 체계도 중요하다. 체계적으로 정치 경험을 쌓고 자연스럽게 당 안팎의 검증을 거친 신인들은 극단의 팬덤에 기대지 않아도 유권자들에게 두루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당론 결정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인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의사 결정 체계를 수평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의회정치의 기초를 다진다면 새로운 정치를 위한 개헌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