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만 해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17개월 만에 최저치로 급락했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이 타격을 받으며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한 영향이다. 급격한 통화 약세가 인플레이션을 부추긴다는 우려가 나오자 러시아 중앙은행은 긴급 회의까지 열며 큰 폭의 금리 인상에 나섰다. 하지만 금리 인상으로 루블화 약세 추세가 바뀌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전쟁이 장기화하며 러시아 경제의 모순이 깊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15일(현지 시간) 긴급 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8.5%에서 12.0%로 3.5%포인트 인상했다. 중앙은행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루블화 가치 방어를 위해 기준금리를 20%로 끌어올린 후 점진적으로 인하해 지난해 9월부터 올해 6월까지 7.5%로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달 기조를 바꿔 1년여 만에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특히 이번 인상은 전날 회의 개최가 결정됐을 정도로 긴급하게 이뤄졌다. 당초 회의는 한 달 후인 9월 15일로 예정돼 있었다.
중앙은행이 원래 일정보다 한 달이나 먼저 통화정책회의를 연 배경에는 급격한 루블화 약세가 있다. 전날 국제외환시장에서 루블·달러 환율은 한때 102루블대까지 치솟았다가(루블화 가치 하락)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 방침을 시사한 후 100루블 안팎으로 떨어졌다. 루블·달러 환율이 100루블을 넘어선 것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였던 지난해 3월 이후 약 17개월 만이다.
루블화 가치는 지난해 5~7월만 해도 달러당 50루블대로 오히려 전쟁 전보다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최근 약세 요인이 잇따랐다. 서방의 제재 효과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이 감소하며 올해 1~7월 경상수지 흑자(252억 달러)가 전년 동기 대비 85% 급감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막대한 국방 지출로 인한 재정 적자, 6월 발생한 바그너그룹의 무장봉기도 루블화 가치를 끌어내린 요인이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러시아 정부로서는 루블화 약세가 달가울 리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전쟁의 영향에서 경제를 안정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데 통화 약세는 수입 가격을 밀어 올려 물가 상승세를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러시아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4.3%로 중앙은행의 목표치를 상회했으며 올해 전체로 봤을 때는 5~6.5%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막심 오레슈킨 러시아 대통령 수석경제고문은 타스통신 기고문에서 “루블 약세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은 느슨한 통화정책”이라며 중앙은행을 압박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루블화가 강세로 돌아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쟁 관련 수입이 늘어나는 동시에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대규모 지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가 이뤄낸 2분기 4.9%(전년 동기 대비)의 깜짝 성장도 상당 부분이 러시아 정부의 전비 및 복지 지출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 중앙은행 관리 출신인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 카네기러시아유라시아센터 방문연구원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루블화 약세는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경제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반영한다”며 “근본적으로 기준금리는 (루블화 약세) 추세를 바꿀 수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