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가 맨체스터다. 축구 팬들에게는 박지성 선수가 활약한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최근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한 맨체스터시티의 연고지로 잘 알려져 있다. 1819년 8월 16일 이 도시 중심에 있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모여든 수만 명의 군중을 기마부대가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 참사를 역사가들은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로 기록한다. 1815년 6월 18일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워털루 전투의 이름을 사건 직후 지역 언론이 패러디해 만든 용어다. 정부와 군대가 자국민에게 행사한 일방적 폭력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에서는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무엇보다 산업혁명으로 위기에 몰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해서라도 일자리를 보존하려고 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노숙자들까지 생존권을 요구하며 시가행진에 나섰다. 의회 개혁 요구도 거셌다. 맨체스터는 이 소용돌이의 진원지였다. 1819년 8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선거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다. 이 당시 영국 의회는 평민 출신의 하원과 귀족회의인 상원으로 구성됐다. 하원의원 투표권은 성인 남성 10명 중 1명도 안 되는 자산 소유자들에게 국한됐다. 게다가 산업혁명 속에서 농촌 인구 중 다수가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선거구는 여전히 농촌 중심으로 획정돼 있었다. 사람들은 유권자가 거의 없는 이런 곳을 부패선거구로 불렀다. 이런 이유에서 선거 개혁이 화두였다. 변화를 두려워한 정부는 집회가 예정된 맨체스터로 군대를 급파했다. 자영농과 소상점주가 주축인 지역 민병대까지 동원됐다. 집회 현장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공포와 분노가 영국 전역에 확산됐다. 국가 폭력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향후 한 세대 동안 영국 사회는 정치와 노동 문제에서 심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