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한국에서 휴대폰 시장을 삼성과 LG가 나눠 갖던 시절. 세계시장에서 삼성이라는 기업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간혹 삼성을 아는 이가 있어도 ‘일본 기업’이냐고 묻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과 가전제품 등 전자기기 산업 전반에서 세계는 삼성을 아는 수준을 넘어서 삼성을 욕망한다. 특히 이 현상은 유럽에서 두드러진다. 콧대높은 유럽에서 삼성은 명품 브랜드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삼성, 유럽에서 어떻게 명품 브랜드가 되었나’는 김석필 삼성전자 전 부사장이 자사 제품을 들고 유럽 각국의 문을 두드린 경험을 고스란히 담은 일종의 영업 및 마케팅 가이드라인이다.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식만으로 통하는 시장도 있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가격이 아무리 싸도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무턱대고 아무 브랜드에게나 맡기지 않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아시아 기업들은 유럽에서도 저가 전략만 쓴다. 싼 제품을 많이 팔면 결국 단기적으로 이윤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파란색 로고의 ‘삼성’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 하는 전략을 택한다.
고급화 전략의 첫 단계는 각국의 특정한 문화 코드에 초점을 맞춰 창의적인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는 것. 각 나라 사람들의 열광 포인트를 찾아내 삼성의 제품을 그와 결합해 홍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성 영국법인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삼성 영국법인은 영국인이 열광하는 ‘축구’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첼시 FC후원 사업을 벌인다. 축구장에 삼성의 로고가 등장하면 브랜드가 대중과 더 친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 광고는 어느 기업이나 쓰는 전략이다.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유럽 거래처 유력 인사를 만날 때 프리미어리그 명문 팀의 ‘박스’에 초대하는 기발한 전략을 세운 것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박스’ 초대는 최고의 귀빈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럽 축구를 예매권 없이 당일에 바로 보는 건 영국인이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은 거래처 사람들을 VIP 박스에 초대해 최고급 식사를 대접하고 경기를 함께 관람한다. 이는 상대의 품격을 높이고 아울러 삼성의 브랜드 가치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민사회가 가장 먼저 시작된 유럽에서 ‘기업 시민’의 역할을 고민한다. 유럽 주요 국가의 오피니언 리더와 커뮤니케이션 하고, 기업이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기업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은 현지에서 채용한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유럽 법인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꾸준히 성장의 길을 제시하고 그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주인 의식을 발현하도록 한 것.
현지 직원들이 ‘내 회사’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성과를 내고 그것이 결국 삼성의 성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 셈이다. 많은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사업을 추진한다. 하지만 제품만 좋다고 해서 모르는 회사에 덜컥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에게 어떻게 나의 회사와 제품을 알릴 것인가, 글로벌 마케팅이 잘 풀리지 않는 주니어·시니어 마케터와 세일즈맨에게 일독을 권한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