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중심은 태양의 궤도를 따라 동에서 서로 이동한다. 바로 역사학자 토인비가 주장한 ‘문명 서진설’이다. 인류 4대 문명(중국·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이 모두 동방에서 발원했고 이후 그리스·로마 문명, 산업혁명을 이끈 서유럽의 제패에 이어 신대륙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갔다. 여기에 빗대 반도체에서도 한때 서진설이 유행했다. 칩 제조의 패권이 미국→일본→한국·대만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도 반도체가 국가전략자산이 되면서 헝클어지고 있다. 국가전략자산이 된다는 것은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장 논리에 반하는 의사결정이 단행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천문학적 보조금이 칩 산업에 투하됐다. 이런 움직임의 결정체가 세계 최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제조) 대만 TSMC의 미국 애리조나 팹 건설이다. 미국은 그간 제조를 저부가 산업으로 낙인찍고 디자인과 설계만 했던 나라다. 당연히 제조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 여기에 인건비도 아시아와 비교하기 힘들 만큼 비싸다. 이런 곳에 칩 공장을 짓는 것 자체가 반(反) 경제적이다.
그 불똥은 TSMC로 튀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국 테일러 공장 건설이 무난히 진행되고 있는 반면 TSMC의 애리조나 팹의 정상가동은 1년이 밀렸다. 팹 건설에 각종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탓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미국 현지 노조 리스크다. 반도체는 극도로 민감한 산업이다. 경기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뜻도 있지만 엔지니어의 숙련도와 기술에 따라 동일한 제품이라도 공장별로 완성도와 불량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도 담겼다. 인텔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피 이그잭틀리(Copy Exactly)’라는 독특한 경영시스템을 도입했다. 한 마디로 똑같이 베낀다는 뜻이다. 생산라인의 경우 프로세스, 장비세트, 부품 공급사, 클린룸, 작업자 교육방법까지 모든 것을 ‘카피’한다.
TSMC도 이 문제 때문에 대만에서 팹 건설 전문 기술자를 미국으로 보내 작업하려고 하자 현지 노조가 반발하고 있다. TSMC가 인텔 팹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현지 인력을 외면하고 건설 지연을 명분 삼아 임금을 덜 줘도 되는 노동력을 미국으로 불러 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시빗거리가 투자비 증가, 팹 운영 연기로 귀결되고 있다. 이미 현지 직업사이트(글래스 도어)에는 TSMC의 과도한 업무, 군대 같은 사내 문화에 대한 비판 여론이 터져 나오는 모양이다.
반도체 장비 가격은 비싸기로 악명 높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대당 2000억 원을 호가한다. 장비가 고장 나 멈추면 엄청난 감가상각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장비를 24시간 가동하는 게 필수다. 그런데 미국에서 밤에 장비에 탈이 났다고 치자. 그러면 다음 날 아침 8~9시까지 기다렸다가 고치는 게 미국 문화다. 하지만 TSMC는 새벽 2시에 장비 엔지니어에게 “당장 오세요”라고 전화해도 불평없이 일한다. TSMC 창업자 장중머우의 얘기다. 이런 것들이 계속 누적되면서 기술 진화 속도가 빠른 반도체 산업에서 TSMC가 결코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인텔을 제칠 수 있었다. 1등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상성(相性)이란 것을 반도체에 대입하면 동북아와 칩 제조는 상성이 좋다. 동북아는 응집력이 강하고 중앙집권적 문화, 상명하복 문화에 익숙하다. 이런 문화의 단점도 수두룩하지만 칩 제조에서는 분명 장점이 더 많다. 치열한 경쟁이 있는 반도체에서 엄격한 근로 문화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다. 누가 뭐라 해도 TSMC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근로 문화가 장비의 감가상각을 낮추는 일등공신이었단 얘기다.
이제 TSMC는 자국에서 통하던 규범과 노동 문화를 글로벌 무대에서 검증받아야 할 처지다. 일찌감치 해외로, 특히 판이한 문화권으로 나가며 노하우와 암묵지를 축적한 인텔·삼성전자와는 입장이 다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규율이 잘 잡힌 근로 문화를 미국에서 연착륙시키느냐가 TSMC의 과제로 남게 됐다. 이게 안되면 칩 가격 급등, 팹리스(반도체 설계)의 파운드리 교체 등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뒤따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