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맞뭍었던 2000년 미국 대선. 승패는 격전지, 이른바 '스윙스테이트'에서 누가 승리할 것이냐에 달려있었다. 대표적 격전지인 플로리다에서는 재검표까지 가는 경합 끝에 부시 대통령이 불과 500여 표 차이로 민주당의 고어 후보를 눌렀다. 고어 후보의 패배의 핵심 요인은 바로 제3의 후보였던 환경운동가 랠프 네이더 녹색당 후보. 네이더 후보가 진보 성향의 공약으로 민주당의 표를 잠식하면서 당시 플로리다에서 9만 7000표에 이르는 득표를 올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네이더 후보는 고어의 표를 가져오면서 부시 대통령 탄생의 일등 공신이 됐다.
24년이 흐른 내년 미국 대선에서 이같은 ‘제3후보 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 커지고 있다. 주인공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그는 지난 9일(현지 시간)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이 선언은 미국 대선 레이스를 흔들고 있다. 케네디 주니어의 당선 가능성보다 과연 그가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느 쪽의 표를, 얼마만큼 잠식할 지가 관건이다. 조 바이든(민주당)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전 대통령 맞대결이 재연될 가능성이 유력할 가운데 케네디 주니어의 등장에 양 당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암살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1968년 피격으로 사망한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아들이다. 환경 변호사 출신으로 민주당에 입당에서 정치인으로 기반을 쌓아왔다. 그는 지난 4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지만 바이든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주요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 평균치를 추적하는 리얼클리어폴리틱스에 따르면 현재 케네디 주니어의 평균 지지율은 약 14.5%다. 61.3%를 넘어가는 바이든 대통령을 당내 경선에 이기기란 사실상 어려운 분위기다.
다만 민주당 밖으로 나와 대선 후보로서 맞대결할 경우 그의 지지도는 다른 후보에게 골칫거리가 된다. 폴리티코는 “1992년 대선에서 득표율 19%를 기록한 로스 페로 후보 이후 케네디 주니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제3후보로 대선 승패를 가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정치 전문 매체 더힐은 “케네디 주니어의 무소속 출마는 대선 결과에 대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셈법을 바꿀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대선의 승자 선정 구조는 더 많은 선거인단의 표를 얻는 쪽이 이긴다. 이때 승리한 주의 선거인단 표는 모두 승자의 득표로 계산한다. 결국 더 많은 주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에 몇몇 경합 지역(스윙스테이트)의 승리가 대선 결과를 가르게 된다. 펜실베이니아·조지아·애리조나·미시간 등이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다. 더욱이 경합 지역의 투표 결과는 적게는 수백 표 차이로 갈라지기도 한다. 제3후보가 전체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케네디 주니어의 경우 각 스윙스테이트에서 수만표를 확보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춘 만큼 스윙스테이트의 선거 결과, 나아가 대선 승자를 바꿀 잠재력을 갖춘 셈이다.
케네디 주니어가 이전에 소속됐던 민주당은 2000년 랠프 네이더 사례가 재연될까 바짝 경계하는 분위기다. 이미 미국의 진보적 신학자이자 흑인 사회운동가인 코넬 웨스트 유니언 신학대 교수가 녹색당 소속으로 대선 출마 방침을 밝힌 상태라 민주당의 긴장은 더욱 크다. 웨스트 교수와 케네디 주니어가 모두 바이든 대통령의 표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비공개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만나 제3후보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조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케네디 주니어가 평소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등 보수주의자들의 성향에 맞는 행보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화당의 표를 잠식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공화당 측은 전날 그의 무소속 출마 선언에 맞춰 ‘케네디 주니어를 반대하는 23가지 이유’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경계했다.
케네디 주니어는 양당과의 차별성을 내세워 지지층을 모으고 있다. 현재 정계에서는 그가 민주당의 우측, 또 공화당의 좌측 지지자와 함께 양당제에 환멸을 느끼는 무당파 들을 지지 기반으로 확보해 나갈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케네디 주니어 후보를 지지하는 슈퍼팩(Super Pac·정치자금 기부 단체) ‘아메리칸밸류’는 “케네디 후보가 무소속 출마를 발표한 지 6시간 만에 1128만 달러(150억 원)의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혔다. 케네디 주니어 슈퍼팩의 공동 설립자 토니 라이언스는 “케네디 후보가 좌와 우, 흑인과 백인, 시골과 도시, 청년과 노년을 통합하는 대중운동에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미국 사회에 변화를 향한 열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 기부단체는 지난해 설립 이후 현재까지 총 2800만 달러를 모금했다. 폴리티코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도 케네디 주니어 후보 측에 정치자금을 후원하며 중도의 길이 열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케네디 주니어는 “두 정당에서 독립돼 있기 때문에 당파적 담론에서 벗어나 과감한 정책을 펼칠 수 있다”며 중간 지대를 공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