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진행될 재판은 A씨에 대한 특수상해 및 모욕 혐의 사건입니다. 쟁점과 증거자료에 초점을 맞춰 사실 확정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7일 오전 11시 서울남부지방법원 406호 법정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이곳에는 배심원석에 앉은 8명의 정식 배심원뿐 아니라 ‘그림자 배심원(Shadow Jury)’12명도 방청석에서 함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 역시 그림자배심원으로서 이날 재판에 참가했다.
그림자배심원은 국민참여재판의 정식 배심원과 별도로 구성돼 형사 재판의 모든 과정을 참관한 후 유·무죄에 관한 평의·평결과 양형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법적 판단 능력 함양을 돕는 것이 취지다. 다만 정식 배심원과 달리 이들의 평결 내용은 재판부의 결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남부지법은 코로나19로 인해 약 2년간 일시 중단했던 그림자배심원 제도를 이날 처음 재개했다.
아파트 단지 내부 오토바이 운행 놓고 시비…CCTV가 놓친 사고 장면
이날 남부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정도성) 심리로 열린 재판은 40대 남성 A씨에 대해 특수상해 및 모욕죄가 성립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 그는 지난해 9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오토바이 통행금지 구역을 우회할 것을 요구하는 피해자 B씨에게 반말과 욕설을 하고 멈춘 오토바이를 다시 몰고 가려다 B씨를 친 혐의를 받는다.
핵심은 A씨가 사건 당시 ‘고의성’을 가지고 있었느냐다. 사고 당시 촬영된 폐쇄회로(CC)TV가 결정적인 충돌 장면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토바이 후면에 위치해있었다. B씨는 오토바이 앞에 서있던 자신을 A씨가 무시하고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A씨는 자신을 가로막은 B씨를 수 차례 피했지만 B씨가 접근해 부딪혔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배심원들은 A씨와 B씨가 각각 제시한 증거자료와 증인들의 진술로 이를 판단해야 했다.
검사는 “고의성은 크게 미필적 고의와 확정적 고의 두 가지로 나뉜다”며 설명을 더했다. “‘내가 이 사람을 들이받아서 다치게 할 거야’ 했다면 확정적 고의인 겁니다. ‘치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쳐도 상관없다’라면 미필적 고의인 거고요. 이 사건에서는 미필적 고의 여부가 관건이죠.”
‘속사포랩’ 쏟는 평소와 달리 쉽고 친절한 재판 과정…일반 시민도 충분히 참여 가능해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판검사 측의 ‘이례적으로’ 친절한 설명이었다. 통상 빠르고 압축적으로 진행되는 재판과 달리 법률 전문가가 아닌 주 배심원단과 그림자배심원을 고려한 듯 기본적인 법률 용어부터 각 재판 절차까지 상세한 설명이 내내 이어졌다.
“여기서 나온 ‘개연성’이라는 말은 ‘가능성’보다도 좀 더 확률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100%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보면 되겠습니다.”
“헷갈릴 수 있으니까 용어 정리 한 번 해드릴게요. 여기서 피의자는 경찰 수사가 시작됐을 때고, 검찰이 기소한 뒤에는 피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피의자, 피고인, 피고소인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예요. 다시 심문 시작하겠습니다.”
상세한 설명에 배심원단은 점점 재판 과정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오전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기간 진행된 재판에 지칠 법도 했지만 각자 메모를 하고 증거서류를 꼼꼼히 톺아보며 중간중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재판이 피고인의 최후 진술을 끝으로 마무리된 뒤 45여 분간 배심원단의 토론이 시작됐다. 같은 시간 기자를 비롯한 그림자배심원단 역시 모의 평의를 진행했다. 그림자배심원의 결론은 특수상해는 무죄, 모욕죄는 유죄였다. 양형의 경우 벌금 100만 원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정식 배심원단은 특수상해는 무죄, 모욕죄는 유죄로 판단하고 박 씨에게 1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배심원단의 의견이나 결과는 권고적 효력만을 가지지만 이날 재판부는 배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법원 관계자는 “그림자배심원과 정식 배심원이 각기 내린 결론이 얼마나 다른지 보는 것도 국민참여재판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과정”이라고 전했다.
배심원단 “생생한 법정 공방 지켜보고 싶다면 강력 추천”
이날 선고 후 법정을 나선 피고인 박 씨는 “국민참여재판의 존재도 몰랐는데 주변에서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신청하게 됐다”며 “전과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이날 배심원으로 참석한 30대 여성 A씨는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하면 공가 처리가 된다고 해서 하루 공가를 내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에서 보던 국민참여재판과 실제 재판을 비교해 볼 수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었다"며 “판사와 검사의 설명도 생각보다 훨씬 충분했다. 법과 전혀 관련없는 직종에 종사하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한 번쯤 경험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편 그림자배심원 프로그램은 2012년~2016년까지는 매년 1000명 이상이 참가했지만 코로나19를 계기로 중단되며 현재 참여율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다. 정식 배심원은 부담스럽지만, 생생한 법정 공방을 지켜보고 싶을 경우 직접 원하는 날짜에 신청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참가 신청은 대한민국법원 사이트의 전자민원센터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