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이 시간을 즐깁시다. 이 공간엔 사랑밖에 없어요(This one thing that we need you to know down tonight, Tonight is about freedom. Let's have a good time it’s all love in this room)."
세계적인 영국 팝 가수 샘 스미스(Sam Smith)가 5년 만에 내한했다. 5년 전 말쑥한 정장에 슬림한 체형으로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던 단아한 모습은 없다. '19금'을 내걸고 선정적인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트월킹(Twerking)을 하다가 망사 스타킹 차림으로 삼지창을 흔드는 모습은 '언홀리' 그 자체다. 그러나 스미스에게서는 치열한 고민 끝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게 된 해방감이 느껴졌다. 에너지는 고스란히 관객에게 옮아갔다.
샘 스미스는 18일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KSPO DOME)'에서 내한 공연 '글로리아 더 투어 2023(GLORIA the tour 2023)'을 열고 1만 명의 관객과 만났다. 이번 공연은 지난 1월 발매한 네 번째 앨범 '글로리아' 발매 투어로, 그는 지난 3일 방콕을 시작으로 대만과 홍콩, 일본 오사카, 요코하마를 거쳐 한국 서울을 방문하게 됐다.
샘 스미스는 지난 2013년 데뷔해 이듬해 발매한 앨범 '인 더 론리 아워 (In The Lonely Hour)'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해당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10위권 안에 연속으로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앨범이라는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의 총 앨범 판매량은 3,500만 장 이상, 싱글 판매량 2억 5,000만 장 이상, 음원 스트리밍 수는 450억 회에 이른다. 아울러 4개의 그래미, 3개의 브릿 어워드, 1개의 오스카와 골든 글로브 수상하며 대중과 평단 모두의 선택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3개 파트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의 '러브(LOVE)', 2부의 '뷰티(BEAUTY)', 3부의 '섹스(SEX)' 순이다. 이는 샘 스미스가 데뷔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과 궤를 같이한다. 스미스는 지난 2019년 자신을 '논바이너리'(성별을 남성 또는 여성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성소수자)라 밝혔다. 그해 '댄싱 위드 어 스트레인저(Dancing with A Stranger)'를 발매하며 그는 "개인으로서의 삶과 아티스트로서의 삶 사이에서 느낀 고민과 감정을 담은 곡"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에 대한 스미스의 답을 이번 내한 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세트 리스트는 데뷔 앨범부터 신보 '글로리아'까지 순차적으로 전개됐다. 1부 '러브'에서는 스미스의 데뷔 초 감성을 볼 수 있었다. '스테이 위드 미(Stay With Me)', '아임 낫 디 온리 원(I’m Not The Only One)', '라이크 아이 캔(Like I Can)', '투 굿 앳 굿바이스(To Good At Goobyes)' 등 따뜻하고 포근한 R&B 장르의 곡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는 듯한 다정한 눈빛과, CD를 재생한 듯한 완벽한 라이브가 공연 초반 몰입도를 끌어 올렸다. 관객들도 일제히 후렴구에서 떼창을 하며 스미스의 내한을 반겼다. '퍼펙트(Perfect)', '다이아몬즈(Diamonds)', '하우 두 유 슬립?(How Do You Sleep?)', '댄싱 위드 어 스트레인저(Dancing With a Stranger)' 등도 무대에 올랐다. 스미스는 순백의 프릴 블라우스를 입고 날갯짓을 하듯 팔을 펼치며 무대를 누볐다.
2부 '뷰티'에서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인 은색 퍼프 드레스를 입은 스미스는 등장만으로도 관객의 뜨거운 함성을 받았다. '러브 곤즈(Love Gones)'에서는 여러 명의 댄서가 무대 전체를 아우르며 현대 무용을 펼쳤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폭발력을 가진 스미스의 '성대 차력쇼' 였다. 이때까지는 그랬다.
'러브 곤즈'가 끝나고 한 남성 댄서가 고상한 몸짓으로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렇게 무대가 끝나나 싶더니 곧바로 '김미(Gimme)' 연주가 흐르고, 남성 댄서는 아까와는 180도 다른 눈빛으로 화려한 트월킹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댄서들이 일제히 나와 격한 트월킹 안무에 동참하고, 그 사이로 까만 프릴 블라우스를 입은 스미스가 등장했다. 러브'에서 입었던 흰색 프릴 블라우스와 색만 다른 옷이었다. 백조와 흑조의 대비처럼, '김미'부터 공연장은 그 이전과 완전히 분위기를 달리했다.
'루즈 유(Lose You)', '프로미스(Promises)', '아님 낫 히어 투 메이크 프렌즈(I’m Not Here To Make Friends)', '래치(Latch)' 무대가 이어졌다. '뷰티' 파트는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연상케 했다. 수위는 19금 공연다웠다. 여성 댄서 두 명이 실제로 키스하고 끌어안으며 격정적인 사랑을 나눴고,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드래그 퀸(Drag queen)도 등장했다. 스미스는 커다란 꽃송이 같은 재킷을 걸치고 좌중을 압도했다. 분위기가 매우 달아오른 그 순간, '아이 필 러브(I Feel Love)' 무대가 나왔다. 댄서들 사이에 둘러싸인 스미스는 그대로 상의를 벗었고, 댄서들은 그의 몸을 관능적으로 더듬고 핥았다. 3부 '섹스'의 시작이었다.
순식간에 무대가 암전됐다. 아까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홀리(holy)'한 합창이 공연장을 에워쌌다. 찬송가를 닮은 4집의 인트로곡 '글로리아'가 흘러나왔다. 순백의 면사포를 쓴 스미스가 천천히 마이크 앞에 서고, 면사포를 벗었다. 그의 몸을 가리는 건 망사 스타킹과 팬티 한 장뿐이었다. 기실 세상이 예뻐하는 슬림하고 탄탄한 몸매는 아니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어릴 적 외모 강박증을 앓았다는 그는 '글로리아'를 통해 처음으로 상의 탈의를 한 앨범 재킷을 공개하며 "내 모습에 자유를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벌거벗은 채 황홀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악마'의 기백이 보였다.
미니 원피스 같기도, 코르셋 같기도, 배의 닻 같기도 한 의상을 걸친 그는 '휴먼 내추럴(Human Nature)' 무대를 끝낸 뒤 본격적으로 악마로 변했다. 악마 뿔 소품을 머리에 쓰고 삼지창을 들었다. 무대가 시뻘겋게 빛나며 '언홀리(Unholy)'가 시작됐다. '언홀리'는 트렌스젠더 킴 페트라스와 함께 발매한 곡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성매매 업소에서 불륜 행위를 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스미스가 실제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지인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이 곡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와 트렌스젠더 가수가 처음으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하고,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상을 받는 영광을 안겼다.
성스럽고 포근했던 '러브'의 시작은 사탄의 '섹스'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스미스는 논바이너리를 공표하고서부터 숱한 논란에 휘말렸다. 난해한 패션과 공연, 선정적인 공연으로 매번 입방아에 올랐다.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스미스는 성별마저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치열한 마음의 고민, 전 세계적 스타로서의 권위와 영광, '사랑'을 좇는 개인까지, 주어진 모든 롤(role)에 있는 힘껏 부딪혔다. 누군가는 '언홀리' 이전의 스미스를 상상하는 건 어렵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스미스가 '사탄'에 들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자신과 세상에 용기 있게 부딪힌 자가 가질 수 있는 값진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