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우수’하다고 평가한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10개 중 7개 남짓 꼴로 내년도 예산이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흡’ ‘부적절’ 평가를 받은 R&D 사업의 삭감 비중(75%)과 거의 같다.
특히 우수 평가를 받은 프로젝트의 평균 예산 삭감률은 25.5%에 달했다. 올해 10억 원의 예산을 받았다면 내년 예산으로는 7억 5000만 원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는 미흡·부적절 평가 사업의 예산 삭감률(9.4%)의 2.7배 수준이다. 사실상 우수 평가를 받을 수 없는 프로젝트가 후한 평가를 받는 등 그간 R&D 사업 평가가 총체적으로 부실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24일 서울경제신문이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2024년도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3년도 상반기 국가 연구개발(R&D) 성과평가 결과’에서 ‘우수’ 등급을 받은 국가 R&D 사업 37개 중 올해 대비 2024년 예산이 감소한 사업은 총 27개로 조사됐다. ‘우수’하다고 평가된 사업 중 73%는 예산이 깎였다는 뜻이다.
‘미흡’ 혹은 ‘부적절’ 판단을 받은 국가 R&D 사업(12개) 중 75%(9개)의 예산이 삭감된 것과 비슷했다.
‘우수’ 평가를 받으면 예산 증액 요소로 고려되며 ‘미흡’ 혹은 ‘부적절’ 등급을 받으면 예산을 줄이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제로베이스에서 R&D 사업을 평가하자 사뭇 다른 결과가 도출된 셈이다. ‘우수’ 사업에도 예산 칼질이 단행돼 관련 사업의 내년 예산은 1조 4000억 원으로 올해(1조 7000억 원)보다 17.4% 줄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R&D 사업 평가자와 피평가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보니 제대로 된 평가가 안 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다만 여태껏 이런 관행을 눈감아 왔던 예산 당국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꼬집었다.
실제 전체 사업 중 ‘미흡’ 판정을 받은 사업은 2.9%, ‘부적절’을 받은 사업은 4.5%에 불과했다. 합해도 7.4%다. 통상 다른 분야 평가에서는 전체의 15%가 낮은 평가를 받음을 감안하면 아무리 R&D 사업이라도 평가가 후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예산 삭감률도 '우수'가 '미흡'의 2.7배…"평가방식부터 엉터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재정 사업에 대해 3년 주기로 중간 평가를 실시한다. 일차적으로 과기정통부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부 등 일선 부처가 자신의 R&D 사업에 대해 자체적으로 우수·보통·미흡 등급을 매긴다. 이후 과기정통부 산하 과학기술혁신본부에서 각 자체 평가가 적절했는지 심사하는 상위 평가를 실시한다. 여기서 혁본은 타당성이 떨어지는 사업에 ‘부적절’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그간 국가 R&D 성과 평가에 대해서는 “등급을 주는 데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지난해 R&D 성과 평가에서 전체 146개 사업 중 ‘미흡’을 받은 사업은 1개에 불과했다. 2021년에도 1개 사업만 ‘미흡’을 받았다. ‘미흡’은 사업 진행 수준이나 논문 발표 성과, 특허 출원·등록, 사업화 등 각종 성과 수준이 떨어지는 재정 사업에 매기는 등급이다.
올해도 ‘미흡’을 부여받은 R&D 사업은 5개로 전체(174개 사업)의 2.9%뿐이었다. 자체 평가 결과가 타당하지 않을 때 매기는 등급인 ‘부적절’까지 포함해도 전체의 7.4%에 불과하다. 재난 안전 및 균형 발전 사업이나 중소기업 지원 사업 등 다른 재정 사업에 대해 실시하는 정부 성과 평가에서 ‘미흡’ 혹은 ‘개선 필요’가 차지하는 비중이 15% 안팎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기정통부의 R&D 성과 평가가 ‘온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올해 R&D 성과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은 사업 중 73%의 예산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 것도 R&D 성과 분석에 대해 재정 당국의 신뢰가 높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우수’ 등급 중 예산을 줄인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73%)이 ‘미흡·부적절(75%)’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은 평가 결과가 예산 편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오히려 우수 사업의 평균 예산 증감률(-25.5%)이 ‘미흡·부적절(-9.4%)’보다 낮게 나오는 기현상도 나왔다. 성과 평가에 대한 낮은 신뢰도로 인해 재정 사업 성과를 토대로 예산을 산정하는 ‘성과주의 예산’이 R&D 분야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과기정통부의 평가를 토대로 예산 당국이 차년도 예산을 산정해 사업별 차별을 주는 게 R&D 성과 평가 제도의 정신”이라며 “그러나 과기정통부가 전문가적 역할을 못 하면서 기획재정부도 과기정통부의 성과 평가를 토대로 예산을 차감하거나 증액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R&D 성과 평가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는 사업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이 꼽힌다. 세종 관가의 한 관계자는 “기초과학 등의 경우 전문가 풀(pool)이 좁아 평가자와 피평가자 사이의 네트워크가 강하다”며 “R&D 사업의 경우 성과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는 점에서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흡·부적절' 비율 7.4% 불과
기재부도 과기부 발표 신뢰 안해
기재부도 과기부 발표 신뢰 안해
과기정통부와 기재부가 R&D 성과 평가에 대해 강하게 ‘그립’을 쥐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올해 초 과기정통부에서는 R&D 사업을 하는 일선 부처에 “자체 평가 시 ‘미흡’ 등급을 무조건 일정 비율 이상 부여하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각 부처에서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과기정통부는 “'미흡'을 10% 이상 자율 설정한다”는 정도로 지침을 조정했다. 하지만 정작 과기정통부도 자신의 R&D 사업을 자체 평가하는 과정에서 ‘미흡’ 등급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미흡' 비율을 늘리는 쪽으로 성과 평가 개편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다 보니 기재부도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성과 평가 결과를 크게 신뢰할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물론 성과 평가는 각 세부 사업에 대한 일종의 ‘고려 지표’ 중 하나라 결과에 따라 예산을 무조건 증액하거나 감액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성과가 좋았다고 해도 예산 당국이 수립하는 거시적 재정 전략에 따라 우선순위가 밀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과 평가와 예산 편성이 ‘따로 노는’ 국면이 이어지다 보니 R&D 삭감에 대해 정부의 설명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결국 R&D 성과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되 사업별 성과 평가와 재정 전략을 어떻게 연계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과 평가 제도가 탁상행정 절차로 전락하지 않도록 재정 당국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