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세계 주요국의 기준금리 인상 행진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인플레이션 둔화 추세에 인상 국면은 일단 멈췄지만 지정학적 리스크 등 불확실성으로 금리 인하 시점은 안갯속에 있다.
ECB는 26일(현지 시간) 그리스 아테네에서 통화정책이사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4.5%로 동결했다. 수신금리와 한계대출금리도 각각 4.0%, 4.75%를 유지했다. 이로써 지난해 7월 이후 이어진 10회 연속 인상 행진은 막을 내렸다.
ECB의 이번 결정으로 미국과 유럽·아시아 등 세계 3대 경제권의 중앙은행 들은 1년~1년 반에 걸친 기준금리 인상 행보를 사실상 마감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달 기준금리를 5.25~5.5%로 동결했다. 시장은 추가 인상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 따르면 11월과 12월 미국 기준금리가 동결될 확률은 각각 99.4%, 79.9%다. 이 밖에 영국과 캐나다·호주 등 주요 국가들도 최근 통화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중국은 인하와 동결을 반복하고 있다.
고강도 긴축의 결과 세계 인플레이션은 둔화되고 있다. 이날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3분기 근원 개인소비지출(PCE)은 전 분기 연율 3.7%에서 2.4%로 둔화됐다. 2020년 4분기(1.8%) 이후 가장 낮다. 유로존의 9월 근원 소비자물가(CPI) 상승률도 9월 4.5%로 0.8%포인트 낮아져 2020년 8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둔화했다. SMBC닛코증권에 따르면 글로벌 정책금리는 평균 7.4%로, 세계 평균 물가 상승률 5.9%를 웃돈다. 마루야마 요시마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고금리가 물가 상승률을 웃돌아 경제를 식히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만 중앙은행들은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한 논의에는 선을 긋고 있다. 오히려 인상 여지를 남기는 분위기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이날 “유로존 경제가 약하지만 물가 압박은 여전히 강하다”며 “중동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는다면 물가는 더욱 악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금리의 방향이나 금리 인하를 논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전했다.
연준 역시 추가 인상의 여지를 남긴 가운데 경제 호조가 이어지면서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리처드 클래리다 전 연준 부의장은 “(연준의 인하 시점이) 2024년 초가 될지, 아니면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더 늦춰질지가 궁금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경제가 고금리나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라 급속히 둔화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호조를 보이는 미국 경제조차 장기 채권금리 상승이나 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등의 요인에 따라 몇 개월 뒤 냉각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보스턴칼리지 교수는 “이미 인플레이션은 둔화되고 있다”며 “현시점에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미친 짓이며 인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