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동료 위험하면 나서서 작업 멈춰라’…노조 ‘진짜 역할’ 묻는 대법원

대법, 노조 작업중지권 인정 첫 판결

임금·복지 우선인 노조, 안전 후순위

기업도 중지권 도와야…삼성, 익명제

민주노총 “중지권 실질 보장위해 노력”

삼성물산 직원들이 현장에 걸린 작업중지권 안내 현수막을 읽고 있다. 사진제공=삼성물산삼성물산 직원들이 현장에 걸린 작업중지권 안내 현수막을 읽고 있다. 사진제공=삼성물산




노동조합이 조합원과 동료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연 의미 있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적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문화 탓에 근로자 개인도 쓰기 어려운 작업중지권을 노조가 행사해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그동안 근로조건의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임금 인상만 요구한 노조에 ‘진짜 역할’을 묻고 이끈 판결로 볼 수 있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콘티넨탈지회장인 A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정직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번 판단은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한 첫 사례다.

지난 2016년 7월 26일 콘티넨탈 공장이 위치한 충남 세종시의 한 산업단지 내에서 화학물질 ‘티오비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티오비스는 상온에 노출되는 경우 분해되면서 유독성 기체인 황화수소를 발생하는 위험 물질로 분류된다. 사고 지점에서 200m 가량 떨어진 콘티넨탈 공장 근로자들은 어지럼증과 두통 등을 호소했고, A씨는 동료 근로자 28명에게 대피를 권유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사측은 A씨에게 작업장을 무단이탈하고 조합원들에게 임의로 작업을 중지하고 이탈할 것을 지시했다며 정직 2개월 징계를 내렸다. 이에 A씨는 정직처분 무효확인 및 해당 기간 동안 임금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당시 A씨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게 적법했는지 여부였다. 1, 2심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만큼 급박한 위험이 없었다”며 사측의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이번 사고로 누출된 물질인 티오비스에서 발생한 황화수소는 독성이 강한 기체이고, 당시 반경 1㎞ 내에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방송이 이뤄진 점에 비춰볼 때 상당한 거리까지 유해물질이 퍼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며 “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200m 정도의 거리에 있던 피고 회사 작업장이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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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왼쪽 세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이 9월 25일 경기 안산시 한 화학물질 생산사업장을 방문해 산업안전보건 관리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정식(왼쪽 세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이 9월 25일 경기 안산시 한 화학물질 생산사업장을 방문해 산업안전보건 관리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산재 공화국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근로자의 안전 역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 사고 위험을 잘 아는 근로자의 의견을 사측(사업주)이 받아들여야 안전한 일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사가 사고 예방을 위해 협력하는 체계와 기반은 너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올해 5월 ‘월간 노동리뷰’에서 노조 사업장 200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중점 의제 1순위로 ‘임금’을 답한 곳이 37.5%로 가장 많았다. 2위는 근로시간으로 9.2%다. 산업 안전은 6위에 그쳤다. 노조 집행부 평균 인원 8명 중 산업 안전 인력도 2명이 전부였고 자체 예산 중 산업 안전 활동 예산도 9%대에 그쳤다. 보고서는 “노조 의제는 여전히 임금과 노동시간, 기업 복지가 중점이고 산재 예방에 대한 관심도가 낮다”며 “노사 관계 내에서 산업 안전은 절대적(독립적) 영역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작업중지권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려면 기업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중대재해가 빈번한 건설 현장은 늘 기한 내 공사 완료 압박을 받는다. 관리자 앞에 ‘을’인 현장 근로자가 작업중지권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통념이다. 이를 잘 아는 삼성물산은 작업중지권을 자유롭게 쓰도록 제도화했다. 작업중지는 모바일 기기로도 활용가능하다. 무엇보다 누가 작업중지권을 썼는지 익명이 보장되는 게 특징이다. 작업중지권이 발동되면, 삼성물산 긴급조치반은 1시간 내 조치를 마치는데, 조치율은 92%에 달한다. 하도급계약서에는 작업중지로 인한 손실을 삼성물산이 보장한다는 조항도 넣었다. 다른 대형 건설사와 달리 삼성물산 현장에서는 작년부터 중대재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노동계에서도 이번 판결을 기점으로 일터 안전을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판결 직후 금속노조는 성명을 통해 “위험으로부터 대피하지 못하거나 작업을 거부하지 못해 매년 2000명의 노동자가 죽어갔다”며 “앞으로 소극적인 대피권을 넘어서 노동자들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알 권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도 “위험한 작업에 대한 노동자의 거부권은 스스로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기본권”이라며 “작업중지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나서겠다”고 전했다.

세종=양종곤·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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