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4개 부처 장차관과 실국장의 민생 현장 방문은 750회(18일 기준)에 달했다. 하루 평균 41회다. 정부가 ‘슈링크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며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품목만 73개나 된다. 23일에도 홍두선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을 방문해 김장 재료의 수급 현황을 점검하고 가격 동향을 살폈다.
윤석열 정부가 마치 물가가 정책의 전부인 양 올인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경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미 소비자물가는 10월(3.8%)까지 3개월 연속 3%대를 찍었다. 가계부채가 전세대출까지 포함할 경우 3000조 원(3분기 기준)에 육박하고 기업부채는 3769조 원(2분기 기준)이다. 가계·기업부채만 근 7000조 원이다. 물가 급등으로 금리를 추가로 올릴 경우 부동산 버블 붕괴, 한계기업의 도산 등이 불가피할 수 있다. 미국·일본 등 주요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고금리 기간 부채가 더 늘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실제 우리나라의 기업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26.1%(국제금융협회 3분기 기준), 가계부채 비율은 100.2%로 미국(76.1%, 73.2%), 유럽(95.5%, 54.6%)과 비교조차 어렵다. 비기축통화국으로서는 주요 국가 중 1위에 가깝다. 자유시장주의를 표방한 이번 정부가 시장의 비판을 무릅쓰고 하루가 멀다 하고 민생을 명분으로 기업 다잡기에 나서는 이유다.
한 나라 경제의 최후의 보루라는 재정이 부실하다는 점도 정부가 무리하는 이유 중 하나다. 올해만 세수 펑크가 60조 원이고 경기와 연동된 내년 세수 전망도 암울하다. 재정이 모자라고 빚 갚을 돈마저 없어 내년 국채 발행으로 잡힌 규모만 158조 5000억 원이다. 설상가상으로 국회는 선거를 빌미로 묻지마 예산 증액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2.8%라는 역대 최저 지출 증가율로 내년도 본예산 639조 원을 편성했지만 국회 예산안 심의 정국은 이를 무위로 돌릴 판이다. 이미 국회 상임위에서 표심을 노린 선심성 예산만 16조 원을 넘어서고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이 있는 전남 순천을 정원 문화 산업 핵심 거점으로 육성한다며 용역비로 5억 원이 증액되는가 하면 춘천에 정원 소재 실용화 센터를 짓는 예산도 32억 원이 늘었다. 올해 정부 예산안에서 아예 제외된 부산 도시철도 오륙도선 예산은 50억 원이 새로 책정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총선 공약인 지역사랑상품권 7000억 원, 3만 원 청년패스 2900억 원 등도 빠지지 않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증액은 정부 권한이지만 상임위에서 우선 요구를 해둬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며 “막판에는 정부도 여당의 압박에 지역 챙기기 예산을 편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여야가 작정하고 지역 사업 등 예산 증액에 나서는 양상이다. 홍우형 동국대 교수는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예산 639조 원도 (올해 편성된 추가경정예산 등을 합친 금액보다 작아) 짠물 예산이라고 하지만 결코 긴축 예산으로 보긴 어렵다”며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국회가 예산 심의 과정에서 또다시 부채를 끌어다 쓸 수밖에 없는 증액을 내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전체 예산을 늘리지 않더라도 선심성 돈풀기 예산에 집중될 경우 정작 적재적소에 쓰여야 할 예산이 줄어들어 경제 침체기 재정 집행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결국 국가 경쟁력만 약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채의 유혹’이 선거를 앞두고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SOC 예산을 중심으로 증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국회가 역할을 망각한 것”이라며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쏘아붙였다. 김 교수는 “코로나19가 극심했던 상황도 아니고 외환위기가 온 것도 아닌데 재정적자가 GDP 대비 3%를 넘는 상황”이라며 “그런데도 국회가 증액을 하면 재정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재정 여력은 소진돼 기초가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선거를 앞두고 무리수를 둔 증액으로 기초마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