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장단 ‘조기 인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대내외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임원인사를 빠르게 마무리해 전열을 정비하고 미래 사업 대응에 매진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및 삼성 계열사들은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일부 사장들과 임원들에게 퇴임을 통보했다. 이는 통상 12월 초에 사장단 인사를 단행해오던 관행과 비교해 열흘가량 빠른 일정이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장단들에게 퇴임 통보가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27~28일께 인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던 이 회장도 인사 발표 이전에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삼성 안팎에서는 내년도 임원인사의 폭이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라는 전망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올해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이 되는 해인 데다 3년 넘게 이어진 이 회장의 부당합병 의혹 관련 재판도 연내에는 마무리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지 7년차에 접어들면서 그룹 전체에 걸리는 과부하가 너무 커졌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그룹 안팎에서 새어나왔다. 올해 실적이 좋지 않았던 만큼 내년에는 인력 쇄신을 통해 대대적 반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 검찰이 이 회장에 대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경영권을 불법 승계했다는 혐의로 징역 5년에 벌금 5억 원을 구형하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재판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내년도 삼성 임원인사는 큰 틀을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이 유임되는 한편 삼성전자는 한종희 부회장과 경계현 사장의 ‘투톱’ 대표이사 체제 역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스마트폰 사업을 이끄는 모바일(MX) 사업 부문의 노태문 사장도 대표이사로 선임돼 삼성전자가 ‘삼두’ 체제로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 인사 방향을 두고 올해는 대내외 불확실성이 너무 커 평가를 1년 유보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년 성적표를 보고 진짜 실력을 판단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은 D램과 낸드 등 메모리반도체 시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매년 수십조 원의 설비투자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AI) 스마트폰인 갤럭시 S24도 1월 중 공개를 앞두고 있는데 특히 이 폰에는 삼성의 자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 2400이 탑재돼 삼성의 시스템반도체 설계 능력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정의 생산능력이 다시 한 번 검증대에 오른다.
물론 파격 인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사상 최악의 반도체 불황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영업이익이 90% 이상 꺾인 상황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삼성의 전통적 인사 기조상 상상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LG그룹이 예상 밖 파격 인사로 세대교체를 완성하면서 삼성 입장에서도 숙제를 떠안은 격이 됐다”며 “인사 결과를 아직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내부에서는 “올해 인사가 ‘역대급’ 깜깜이로 흘러가고 있어 결과를 내다보기 어렵다”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다.
삼성 조직개편의 핵심인 미전실 부활 여부도 아직은 안갯속이다. 삼성은 2017년 미전실을 해체한 뒤 전자 계열사 중심의 사업지원 TF, 삼성생명 금융경쟁력 제고팀, 삼성물산 EPC(설계·조달·시공) 사업경쟁력강화TF 등으로 컨트롤타워 기능을 나눠 운영해왔다. 미전실이 필요하다는 데 있어서는 그룹 내부에서 이견이 거의 없지만 이 회장의 승계 플랜 대부분을 옛 미전실이 짰다고 검찰이 의심하고 있어 내년 1심 선고가 나오기 전에 미전실을 되살리기는 부담스럽지 않겠냐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삼성 임원 출신의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회사가 어렵다고 할 때마다 임원들을 대거 교체하는 방식으로 조직 전반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위기를 돌파해왔다”며 “C레벨 이상 고위급 인사가 제한되더라도 젊고 실력 있는 인재를 깜짝 발탁하는 식으로 판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