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에는 확립된 규범이 있다. 국가의 권력 행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국적국 법원이 가해국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 행위가 국제법상 강행규범을 위반했거나 국제범죄에 해당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국제사법재판소와 유럽인권법원도 이를 명시했다.
이 같은 재판권 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에 따르면 한국 법원이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일본국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재판권 면제가 인정된다고 해서 가해국의 국가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당사국들이 합의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고등법원 제33 민사부는 23일 국제법상 재판권 면제 원칙과 개인 청구권 실현 방식을 오해해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재판권을 행사했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법정지국(法廷之國) 영토 내에서 그 국민에게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권력 행위라도 재판권 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관습법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번 판결은 국제법상 재판권 면제 원칙을 오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한국 법원이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청구권이 실현될 수 없으므로 재판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제법과 국내법 모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전쟁이나 식민 지배 등으로 인한 국가 간 과거사 문제에서 일방 국민의 손해배상청구권 문제는 어느 한 국가의 법원 판결이 아니라 당사국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해결돼왔다.
따라서 한국 법원이 일본국의 재판권 면제를 인정하더라도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을 실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부 피해자들은 2015년 한일 정부의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으로부터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는 재판권 면제라는 국제법과 별개의 문제다.
헌법상 3권분립 원칙에 따라 행정부는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국내 헌법상 3권분립 원칙이 국제법에 위반된 사법부의 판결을 대외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법부가 국제법에 위반된 판결을 내리면 행정부와 입법부는 이를 시정할 국제법상 책임을 지게 된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 대부분이 이와 같다.
국제법은 국가 간 관계에 관한 것이므로 일국의 국내법이나 법원의 판결로 국제법을 대체할 수 없다. 국내 법원의 일방적 판결로 국제법이 대체될 수 있다면, 즉 국제법 문제에서 국내 법원의 판결이 우선한다면 국제법 존립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 국제법을 국내적으로 이행할 때 그 국제법의 지위가 헌법과 같은지 또는 법률과 같은지가 문제가 될 수는 있다. 다만 국가 간 관계의 규율에서는 국제법이 언제나 국내 법원의 판결보다 우위에 있다. 따라서 어떤 국가든 자국 법원의 판결을 아무리 내세우더라도 국제법 위반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판결은 재판권 면제에 관한 국제법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결국 행정부와 입법부는 이번 판결로 일본 정부의 재산이 강제 집행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