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방안을 두고 정부와 의사단체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정부 여당은 늦어도 내년 1월까지 의대 정원 확대 규모를 확정한다는 입장인 반면 대한의사협회는 정원 확대에 반대하면서 진료 거부 등 집단행동까지 불사할 태세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는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0년 이후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두 차례 있었지만 모두 좌초됐다”며 “의사 공급 확대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의대 정원을 우선 최소 1500명 이상 늘려 의료 붕괴를 막고 의료 수가 개혁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의사과학자를 늘리기 위해서도 의사 공급 확대가 시급하다고 했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한 의사 증원에 나섰다.
△의료 체계는 크게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하나는 의료 제공 체계, 즉 의료 서비스의 공급이고 또 하나는 재원 조달 체계다. 의료 제공 체계는 의사 공급과 배분, 병상 확보가 핵심이다. 재원 조달 체계는 건강보험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의료 제공 체계의 핵심인 의사 공급에서 문제가 생기니 의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응급실 뺑뺑이, 지방 의료 붕괴 등의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의료법에 따라 의사의 권한이 막강하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이 조제되고 간호와 돌봄 서비스가 이뤄지는데 의사가 부족하면 의료 체계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의사 부족 문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 않았나.
△2000년대 3500~3600명 수준이던 의대 정원이 2007년 3058명으로 동결됐다. 당시에는 의사에 대한 동정론이 많았다. 1980년대 20여 개에 불과하던 의대가 2000년에는 40개로 확 늘면서 의료 수요보다 의사 공급이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의사들 수입이 감소한 데다 2000년대 초 의약 분업까지 시행되면서 의사들이 극단 투쟁에 나서자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의대 정원을 동결했다. 2010년부터 저를 비롯한 몇몇 전문가들이 고령화 등에 따라 의사 부족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의사 정원 확대가 논의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의사 증원 문제가 정책 어젠다로 채택됐고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됐지만 의사단체의 저항으로 좌초됐다. 의사들의 로비력이 상상을 초월한 데다 정책 추진 동력도 부족했다. 2020년에도 의사 부족이 이슈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의료 인력 부족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됐기 때문이다. 이때도 의사들의 반대로 결국 철회됐다.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놓친 것이다. 오히려 의대 정원을 확대할 경우 의사들과 협의해야 한다는 ‘9·4 의정 합의’만 해줬다.
-우리나라의 의료 접근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지 않나.
△우리의 의료 제공은 민간 의존도가 높지만 재원은 건강보험이라는 공공 중심으로 조달된다. 병상 기준으로 보면 94%, 병원 기준으로는 89%를 민간이 책임지고 있다. 민간 비중이 90%를 넘나드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민간 비중이 일본의 경우 70%이며 서구 국가들은 절반도 안 된다. 진료를 민간에 맡기고 의료 수가를 통해 가격을 컨트롤하는 게 우리나라 구조다. 이렇다 보니 의사들은 진료의 양을 늘리는 방식으로 수입을 올린다. 진료의 양을 늘리려다 보니 효율성이 높아지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효율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현재 우리나라 의사는 얼마나 부족한가.
△의사 수가 인구 1000명당 2.6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한의사(1000명당 0.4명) 포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3.7명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다. 또 의대생 정원이 인구 10만 명당 7.3명(한의대 포함)으로 OECD 평균(14명)의 절반가량에 그친다. 물론 인구당 의사 수를 반드시 OECD 평균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의료 효율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까지 감안하면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사단체는 의사 수가 증가하면 유인 수요로 인해 외려 전체 의료비가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의사가 진료 수요를 유발해 과잉 진료를 하는 현상을 의사 유인 수요라고 한다. 의료 시장은 의사가 환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비대칭 정보 시장이다. 따라서 공급자인 의사가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다. 환자에게 더 많은 진료를 권유함으로써 진료 수요를 창출해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더구나 우리는 행위별 수가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어떤 하나의 병을 고칠 때 진료·치료를 많이 할수록 의사의 수입도 많아진다. 의사단체의 주장은 의사 수 증가로 수입이 줄어들면 과잉 진료가 남발돼 의료비가 증가할 것이라는 얘기다. 의사 수가 과잉인 경우에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의사 유인 수요를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 의사 수 부족이 문제인 상황이다.
-정부의 수요 조사에 따르면 의대들은 정원을 최대 4000명까지 늘리기를 원한다.
△생존 위기에 처한 지방 대학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다른 학과는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지만 의대는 정원을 확대하는 만큼 학생도 늘어난다. 하지만 의사 공급이 너무 많으면 의사 유인 수요가 발생해 의료 비용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있다. 의대 정원을 4000명으로 늘리면 OECD 평균까지 의사 공급을 끌어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의료의 효율성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현 정원의 절반인 1500명 이상은 늘려야 한다. 다만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 내년에 의대 정원을 늘려도 10년 후에야 의사 부족 현상이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단체는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 필수의료 붕괴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붕괴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해 의사 수를 늘리지 않으면 해결 자체가 안 된다. 필수의료나 지방 의료로 의사를 배분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만한 의사가 충분히 확보돼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전공의 배정 인원이 3500명인데 의대 정원이 이보다도 적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의대 정원 확대밖에 없다. 의사 수가 늘어도 피부·성형외과 등으로만 몰릴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이 분야의 경쟁이 치열해져 수입이 줄어들면 결국 필수의료 분야를 택하는 의사도 늘어날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당연한 낙수 효과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특권 의식을 갖고 있어서인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지방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지방 의료 붕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의사 공급을 늘려 해결해야 한다. 다만 지역 출신 학생을 의대생으로 선발하는 지역할당제 비율이 현재 40% 수준인데 이를 더 높여야 한다. 의사를 특정 지역에서 근무하게 하는 ‘지역의사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책은 실효성이 높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인기가 있어서 시행이 어렵지 않다.
-고령화에 따라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건보 재정에 문제가 없다. 2000년대 초 의약분업을 하면서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의료 수가를 대폭 인상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누적 적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일시적 적자가 발생한 경우는 있으나 누적 적자는 없었다. 현재 건보 재정에는 약 24조 원의 누적 적립금이 쌓여 있다. 지금까지는 건강보험료를 지속적으로 인상하는 방식으로 흑자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 역시 지속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현행법상 건보료는 8.0%를 넘길 수 없게 돼 있는데 현재 건보료가 7.09%인 만큼 향후 5~6년 정도는 여유가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고령화로 인해 의료비 부담이 늘고 건보료도 8.0% 이상으로 높이기 어려운 만큼 건보 재정에 대한 압박이 커질 것이다. 의사 공급을 늘려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의사 수가 부족하다 보니 의사 몸값이 한없이 올랐고 의료비도 증가했다.
-의사단체의 주장대로 의료 수가를 인상하면 건보 재정의 부담도 커질 텐데.
△무분별한 수가 인상은 하책 중의 하책이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공단과 의사단체가 맺는 환산지수계약과 상대가치점수 인상을 통해 수가가 연평균 4%씩 올랐다. 여기에 고령화까지 겹쳐 최근 10여 년간 의료비가 9%씩 증가했다. 물가보다 의료비가 2~3배 빠르게 증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2000년 5%에도 미치지 못하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민 의료비가 2022년 9.7%까지 올랐다. 현재는 OECD 평균(9.3%)과 유사한 수준이지만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는 모든 진료 분야의 수가를 올려주는 게 아니라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진료 행위의 수가만 선별해 올리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He is…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용산고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18년 동안 보건복지부에서 근무했다. 서울대와 도쿄대에서 보건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정책 프로젝트 매니저, 한국보건경제·정책학회 회장,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