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부터 기준금리를 연 3.5%로 8연속 동결했던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 인상 카드를 사실상 포기했다. 금리 인하 역시 상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명확히 내비쳤다.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유지하겠다며 중소기업에 대한 저금리 지원 방안도 내놓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1일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한 직후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물가 둔화 추세가 지속되고 국제유가, 중동 사태 등 해외 리스크가 완화하면서 기준금리 추가 인상 필요성은 이전보다 낮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날 이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5명은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동결한 데 이어 향후 3개월 동안 현 수준을 유지하자는 의견을 냈다. 직전 회의인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추가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금통위원이 4명이었는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대로 하락하자 더 올릴 이유가 없어졌다고 본 것이다. 이로써 이번 금리 인상 사이클의 정점은 연 3.5%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통위원들은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긴축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유지하자는 데 뜻을 함께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2%로 둔화 추세를 나타내고 있으나 이후 하락 속도가 기대만큼 빠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서민에게 고통을 주는 체감물가는 소비자물가보다 0.7%포인트 높은 4% 수준인 만큼 여전히 물가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섣불리 금리 인하에 나설 경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자극하면서 물가 상승률이 다시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금통위원들은 현시점에서 금리 인하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물가뿐 아니라 집값이나 가계부채도 금리 인하 논의를 막는 요인이다. 금통위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를 인정하면서도 집값 상승 기대를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이 총재는 “현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가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보다 부동산 가격 상승 기대를 자극하는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며 “고금리 기조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기대심리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금통위는 장기 긴축 기조를 대비해 ‘금융중개지원대출’ 방안도 내놓았다. 9조 원 규모의 금중대를 활용해 중소기업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금중대는 한은이 시중은행에 기준금리보다 낮은 연 2%로 대출을 제공하면 은행이 다시 대출금리를 산정해 취약 업종이나 지방 소재 중소기업에 대출을 내주는 방식이다. 한은은 전체 한도의 80%인 7조 2000억 원을 지방에 배정하기로 했다.
이 총재는 “이번 금중대 지원 목적은 금리 인하를 논의하기 시기상조일 뿐 아니라 상당 기간 고금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더 받는 취약 업종이나 지방 중소기업을 선별적이고 한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조윤제 위원은 금중대와 관련해 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 긴축을 유지하겠다는 정책 방향과 다른 신호를 줄 수 있다며 반대 소수 의견을 냈다.
이 총재는 이번 금중대 대책이 건설사 PF 사태와는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태영건설 사태가 부동산이나 건설업 위기로 번져서 시스템 리스크가 될 가능성은 적다”며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한은이) 대포를 쏠 수 있고 소총으로 막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소총 쓸 정도도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태영건설은 다른 건설사와 차별화될 정도로 부채비율 등이 높아 위험관리가 잘못된 대표 사례”라며 “태영건설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사태가 부동산 PF나 건설업 부실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10일(현지 시간)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의 상장을 승인한 것과 관련, “비트코인이 화폐 대체재가 아니라 하나의 위험자산이자 투자자산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며 “상장됐으니 변동 폭을 보면서 투자자산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시험할 기회”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한은의 금리 인하가 3분기 이후에나 돼야 이뤄질 것으로 입을 모았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3분기 물가 안정 범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2분기 부동산 구조조정 강도를 확인해야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명실 하이투자증권 연구원 역시 “한은이 금융 안정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적어도 상반기 내 금리 인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있다”며 “시장 기대보다 인하 시점이 늦춰질 수 있으나 올해 인하 가능성이 높아진 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