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자신 있게 혁신을 하려면 금융권 대출보다 주식시장의 위험자본을 끌어와야 하는데 한국은 자기자본(에퀴티) 자금을 싸게 조달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미국 나스닥의 경우 엄청나게 높은 멀티플(미래 수익에 대한 투자 배수)이 형성돼 있어 자금 조달 비용이 낮으니 혁신 기업들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국내 대표 행동주의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의 이창환 대표는 1일 한국 기업의 혁신 경쟁력이 최근 크게 떨어진 이유를 묻자 이렇게 진단했다. 외국인과 기관투자가의 국내 증시 외면이 또다시 신기술 창조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말이었다.
실제 최근 국내 증시에서는 글로벌 최첨단 기술 시장을 이끌며 외국인 자금을 흡수하는 ‘스타 상장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국내외 기관이 위험자본 공급을 주저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금 조달 시장이 경색되면서 기업이 다시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있다. 10년이 멀다 하고 신기술 혁신 기업이 출몰하는 미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이는 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가치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구글, 메타, 엔비디아, 아마존 등 지난해 나스닥의 상승세를 이끈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세븐(M7)’ 종목의 합계 시가총액은 11조 4763억 4800만 달러(약 1경 5280조 원, 1월 말 기준)에 달한다. 여기서 최근 전기차 시장 부진으로 주가가 빠진 테슬라를 제외하고 인공지능(AI)·정보통신기술(ICT) 혁신주 6개의 시총만 더해도 10조 8798억 6900만 달러(약 1경 4485조 원)에 이른다. 이는 코스피 전체 시총 2030조 327억 원의 7배가 넘는 수치다. 심지어 MS(2조 9541억 9300만 달러), 애플(2조 8511억 7400만 달러), 아마존(1조 6038억 4200만 달러), 엔비디아(1조 5197억 1700만 달러) 등은 단일 기업 시총이 2000조 원을 넘어 코스피 전체 규모와 비슷하거나 더 많다. 미국에 나스닥 기업만 3000개가 넘고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종목도 따로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험자본 공급에 대한 투자자들의 자신감과 신뢰가 한국보다 월등히 높은 셈이다.
세계시장에서 혁신 기술을 높이 평가받는 기업은 미국 현지 기업뿐만이 아니다. 뉴욕 증시에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형태로 상장된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TSMC 시총도 5858억 5800만 달러(약 780조 5800억 원, 1월 말 기준)로 삼성전자(005930)(434조 32억 원)의 2배에 육박했다. AI와 관련해 시스템반도체의 중요성이 부각하자 세계 1·2위 기업 간 성장성 격차가 더 벌어진 결과다. 글로벌 증권가에서는 TSMC가 조만간 테슬라를 제치고 M7의 지위를 꿰찰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에 비하면 한국 기술주의 현실은 초라하다. 국내 증시에서 AI 테마주로 묶인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000660), 네이버(NAVER(035420)), 카카오(035720)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어보브반도체(102120)·제주반도체(080220)·픽셀플러스(087600)·이스트소프트(047560)·한글과컴퓨터(030520) 등 대다수는 시총 규모가 작은 중소형주다. 국내 대표 기술주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네이버 주가도 지난해부터 올 1월 말까지 고작 31.46%, 12.96% 상승하는 데 그쳤다. 카카오는 외려 1.1% 떨어졌다. 엔비디아(321%), 메타(224%), 아마존(85%) 등과 비교하기 겸연쩍다. 지난해에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인 파두(440110)가 ‘뻥튀기 상장’ 의혹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초저출산 현상으로 국가 성장 동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이 함께 도전 정신을 고양하는 문화부터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본시장 신뢰를 두텁게 해 외국인·기관도 과감하게 벤처 상장사에 돈을 넣을 유인을 만들고 기업들도 초기부터 내수가 아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대기업의 사외이사들이 ‘거수기’가 아닌 ‘감시자’의 역할을 다하게 해 경영 혁신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정부 역시 초기 투자부터 엑시트(투자금 회수)까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벤처 생태계를 탄탄히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신진영 자본시장연구원장은 “한미 양국 사이에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 모험자본 투자에 대한 인식 차이가 큰 데다 ‘패스트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성장한 기존 대기업들도 회사 문화를 바꿀 필요를 못 느낄 것”이라며 “미국과는 투자 환경이 다르다 보니 한국의 벤처기업 중에도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 성장할 회사들이 잘 안 보인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