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입법에 대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이번 정부에서 많다는 지적이 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으로 국회를 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부권이 여러 번 행사됐다고 해서 ‘남용’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부터 살펴보면 최근 국회 입법이 내용뿐 아니라 절차조차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뤄져 행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권한과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이완규 법제처장은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거부권 행사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법제처는 행정부 내 법률 유권해석 기구로 정부입법 계획의 수립·시행 등의 활동을 조정·지원한다. 특히 국회에서 이송된 법률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공포하는 등의 법제 행정에 관한 사무를 총괄한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법제처를 이끌어온 이 처장은 한 시간가량 이뤄진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가 시사하는 정부와 ‘여소야대’ 구도의 국회 간 갈등, 올해 주요 업무 추진 계획 등에 대한 소신을 피력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20년 넘게 검찰에 몸담은 데다 법학 박사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이 처장은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서도 법률 전문가답게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답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서울대 법대와 사법연수원 동기로 절친인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될 때도 문제를 제기할 만큼 원칙주의자인 이 처장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배경을 정부 입장에서 설명하면서 헌법을 가장 강조했다. 그는 헌법에서 국가조직을 행정부와 입법부·사법부로 나눈 삼권분립을 근거로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간 견제와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행정부를 이끄는 대통령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만큼 그 권한을 국회가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과 책임은 국회가 준 것이 아니라 국민이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될 수 있는 법안으로 헌법 위반과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에 배치되는 경우 등 두 가지를 제시했다.
이 처장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법안이 헌법을 위반한 경우에만 거부권이 행사돼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반대”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국정감사 등을 통해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지만 행정부를 이끌어나가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이 처장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국회가 반대 의견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법률로 다른 방향을 강제하면 대통령 입장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현 정부 출범 후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법안들을 그 예로 들었다. 지난해 4월 양곡관리법을 시작으로 지난달 30일 국무회의를 거친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까지 대통령의 거부권은 다섯 번에 걸쳐 9개 법안에 대해 행사됐다.
이 처장은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는 것은 국회와 정부 간 협조가 잘 이뤄지는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에 헌법의 원칙을 근거로 보면 거부권 행사가 늘어난 것이 적절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여야 합의 없이 야당 주도로 쟁점 법안들이 일방적으로 강행 처리되고 있는 국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처장은 “이전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며 “정부와 국회 간 타협이 이뤄지고 국회도 여야가 서로 자제하면서 무리하게 법안을 만드는 일이 적었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은 모두 국민의 투표로 선출돼 민주적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양측 간 대립의 결과인 거부권 행사가 바람직한지는 결국 국민이 판단할 몫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처장은 “특정 법안에 대해 대통령과 국회의 생각이 다른 경우 거부권 행사가 이뤄질 수 있는데 이는 정치적인 행위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선거에서 투표로 의사를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처장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앞서 올해 첫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된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검 도입 법안)’에 대해서는 총선용 악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법안의 정치적 성격과 특별검사의 정치적 중립성 등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법안 내용에 대해 이 처장은 “수사 대상인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지난 정부 시기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고발해 이미 충분히 수사가 이뤄져 재판 중인 사건”이라며 “이 법이 지금 시행될 경우 특검 선정 등 준비를 거쳐 수사가 이르면 이달부터 시작될 텐데, 총선을 두 달 남겨둔 시점에서 선거 기간 내내 브리핑 등을 통해 수사 내용이 총선 이슈로 부상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이어 과거 수차례 특검이 도입된 사례를 근거로 “특검이 도입되더라도 별 성과를 내지 못할 수 있는데, 선거에는 이미 영향을 미치고 난 후”라며 “선거에서 흔히 등장하는 ‘아니면 말고’식의 무분별한 폭로와 다를 게 없다”고 꼬집었다. 특검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에 대해서는 “특검은 기존 수사기관인 검찰이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만드는 비상수단” 이라며 “검찰의 수사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검은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돼야 하지만 이번 법안의 특검은 선출 단계부터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지는 문제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말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쌍특검법은 특검 추천권을 ‘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됐던 교섭단체를 제외한 교섭단체와 교섭단체가 아닌 원내 정당’에 부여해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배제됐다. 기존 특검은 모두 여야 합의로 도입됐으나 이번에는 그런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했다.
이 처장은 쌍특검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 과정에서 정부 부처 간 의견은 완전히 일치했다고 전했다. 그는 “거부권 행사 근거를 담아 국회에 보내는 재의요구안은 소관 부처인 법무부가 작성했고 법제처의 심사를 거쳤다”면서 “심사 결과 법무부의 의견이 대부분 법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올해 법제처의 중점 과제로 신산업·기술을 위한 규제 개혁, 미래 법제 준비, 지방분권 강화 지원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이 처장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산업·기술 분야에 걸림돌이 되는 법률을 고치는 것이 규제 개혁”이라며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법률은 소관 부처에 개정을 권고하지만 여러 부처들이 관여돼 합의가 이뤄지지 않거나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처장은 “총리실과 협조해 규제 개혁 지원에 법제처가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과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미래에 예상되는 법률적 쟁점들에 대한 대비에도 나섰다. 그는 이를 위해 전담 조직인 미래법제혁신기획단을 올해 초 신설했다고 전했다. 2년간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이 조직은 미래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일어날 법률적 쟁점과 제도적 대안 등을 연구하게 된다.
이 처장은 “다양한 융합 기술·산업과 관련해 미래에 발생할 문제는 어떤 부처든 미리 나서서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문제가 닥치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처장은 최근 즐겨보는 TV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배경인 고려 초기 지방의 호족 세력이 왕권 강화 시도에 반발하는 사례를 예로 들며 지방분권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국가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중앙과 지방정부의 관계인데 중앙정부 중심의 중앙집권제와 지방 중심의 지방분권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이 적절하게 조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자결권이며 같은 원리로 각 지역 문제를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려는 욕구가 있다”며 지방분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확대해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법제처 업무인 법령 심사 및 해석에 적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각종 법률에서 지자체 재정으로 운영하게 돼 있는 내용은 대통령령 대신 해당 지자체 조례로 정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