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의사단체를 겨냥한 전방위 공세에 나서면서 일선 병원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13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전일(12일) 진행된 온라인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박단 회장(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을 제외한 집행부 사퇴와 비상대책위원회 전환을 의결했다. 대전협은 이날 오전 홈페이지에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며 비대위 전환을 공식화하면서도 파업 등 집단행동 여부와 계획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전일 밤 9시에 시작해 이튿날 새벽 1시께 회의를 마칠 때까지 파업 여부 등을 둘러싼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 것으로 알려졌는데, 비대위 전환 외에 공식 입장은 내놓지 않았다. 비대위 구성이 구체화되지 않은 데다 비대위 전환 자체가 파업 등 집단행동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파업 안하고 (머리) 숙이는 분위기”라는 글이 올라오자 의료계 안팎에서는 전공의들이 신중 모드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앞서 대전협이 90%에 육박하는 집단행동 참여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수 차례 시사하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을 언급하지 않은 데다 정부가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면허 취소를 운운하는 등 유례 없이 강경한 기조를 취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89.3%가 찬성하는 등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압도적 지지 여론이 형성된 것도 2020년 총파업 때와 달라진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정부는 의료계 파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16개 전국광역시도의사회와 대한의사협회 집행부 등 개원의 단체에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를, 전공의를 교육하는 수련병원들에 '집단 사직서 수리 금지'를 각각 명령하는 등 강도높은 선제 조치를 취했다. 정작 의사 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지목됐던 전공의 단체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전환을 선언했을 뿐, 파업 등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당초 의료계에서는 ‘빅5’로 불리는 서울 상급종합병원 5곳(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 소속 전공의들이 이르면 이달 15일까지로 예정된 전문의 실기시험 종료 직후 파업에 나서면 의료대란을 촉발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렸다. 전공의들은 파업 시 파급력이 가장 큰 의사집단으로 꼽힌다.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 증원을 추진했을 당시 개원의 파업 참여율이 한 자릿수에 그친 반면 전공의 파업 참여율은 약 80%에 달했다. 전공의들은 법적으로 수련을 받는 의사지만 대학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에서 야간·휴일 당직을 도맡으며 '허리' 역할을 맡는다. 중증·응급 환자의 수술 과정에도 일부 참여하는 만큼 전공의들이 파업에 나서면 당장 예약 환자 이외의 외래 진료가 어렵고, 신규 입원 및 외래 환자의 접수가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머지 않아 응급실, 중환자실 입원마저 막히고, 파업 기간이 길어지면 전임의, 대학교수들의 연쇄 이탈로 이어질 수 있어 의료 대란이 불가피하다는 게 일선 병원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정작 전공의를 비롯한 현장 의사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보건복지부가 파업 시 업무개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전국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 1만5000명 전원의 개인 연락처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료계에서는 "검찰 독재국가"냐며 큰 공분이 일었다. 복지부를 필두로 법무부, 경찰청 등 범부처가 함께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공동 대응하는 데 대해 "의대 증원보다 파업 대응을 더 치열하게 준비한 것 같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이 이달 8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브리핑에서 "전공의들 연락처를 정부가 확보했다는 보도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업무개시명령의) 문자 송달을 위해서 연락처를 확보할 계획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음에도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는 모양새다. 급기야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복지부가 전공의 약 1만5000명의 개인 연락처를 무단으로 수집하고 (이를) 업무개시명령 등 전공의들을 겁박할 목적으로 이용하겠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며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과 협박, 강요 혐의로 조규홍 복지부 장관과 박 차관, 의료인력정책과 공무원들을 지난 12일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전공의들이 파업 대신 병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투쟁 수위가 낮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통상 수련병원은 인턴의 경우 1년, 진료과목을 정한 레지던트의 경우 3∼4년의 수련기간을 명시해 수련 계약을 맺는다. 계약 갱신 시점이 3월로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일부 전공의들이 수련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에 병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파업 참여 의사들에게 면허 박탈 등 강도 높은 제제를 가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언급해 왔다. 집단휴진 등 의사들이 단체행동이 나설 경우 정부는 의료법 제59조에 따라 업무 개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불응하 경우 1년 이하의 자격 정지 뿐만 아니라 3년 이하의 징역형도 가능하다. 특히 지난해 의료법 개정으로 어떤 범죄든 '금고 이상의 실형·선고유예·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을 때 의사 면허를 취소할 수 있게 되면서 제제 강도가 높아졌다. 의사들이 정부의 업무개시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면허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업무개시명령을 위반하면 의사뿐만 아니라 그들이 몸담은 의료기관도 1년 범위에서 영업이 정지되거나 개설 취소, 폐쇄에 처할 수 있다. 의료법 외에도 응급의료법, 공정거래법, 형법(업무방해죄) 등으로도 면허 취소가 가능하다. 실제 2000년 의약분업 추진으로 의협 차원의 집단휴진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당시 의협 회장은 공정거래법과 의료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면허가 취소됐다.
이 같은 부담감에 집단행동을 주저하는 전공의들이 적지 않다보니 재계약을 안하거나 개인 차원에서 일신상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합법적인 형태로 반발 의사를 나타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이다. 익명을 요한 빅5병원 소속 교수는 "당장은 전공의들은 물론 병원 전체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인 진료가 이뤄지고 있다"면서도 "전공의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지목되며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받는 현실로 괴로워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는 이날 의대증원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전국 의대 대표자 회의를 열 예정이다.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벌였던 2020년 당시 의대생들은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 거부와 동맹휴학 투쟁을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