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이탈이 본격화한 전날 전국 곳곳에서 수술과 진료가 연기되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을 중증·응급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등 의료 시스템의 과부하를 막겠다는 방침이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당장 2주도 버티기 어렵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의료계에 따르면 20일 오전 6시를 기점으로 전공의가 근무를 중단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이른바 서울 ‘빅5(서울대·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성모)’로 불리는 병원들은 환자들의 수술과 입원·진료 일정을 조정하는 데 혼선을 빚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은 전공의 집단 사직에 앞서 수술 일정을 조절했고 과별 상황에 맞춰 추가 조정하고 있다. 이미 환자들에게도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 진료를 재예약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전공의가 전부 빠졌을 때 기존 대비 50% 수술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절반만 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고 진료과별 인력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수술은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전날 응급·중증 수술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당장 오늘부터는 수술 일정을 절반으로 줄일 예정이다.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26일 수술 예정이었다는 한 갑상선암 환자는 수술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암 수술 전부터 취소라니, 암 환자는 암을 키우라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 병원들은 수술이 연기·축소된 데 따라 신규 환자 입원도 제한적으로 받고 있다. 일부 진료과는 환자들의 퇴원을 다소 당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전날 다른 ‘빅5’ 병원에서 만난 중증 환자들도 전공의 이탈로 인한 수술·입원 스케줄 조절로 분노와 함께 불안감을 동시에 표시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A(59) 씨는 “지난해 10월 위암으로 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고 수술 이후 2개월 만에 15㎏까지 빠진 상태”라며 “진료를 보고 항암을 할지 소견을 들어야 하는데 진료가 1주일 넘게 늦어졌다. 지금 의사를 만난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한 암 환자의 보호자는 퇴원 수속을 밟고 있다고 했다. 이 보호자는 “정상적 진료가 힘들어 인근 다른 종합병원에 입원하고 다음 달 다시 입원하라는 안내를 받았다”고 전했다.
정부에 따르면 19일 오후 6시 기준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총 34건이었다. 수술 취소가 25건으로 가장 많고 진료 예약 취소는 4건, 진료 거절은 3건, 입원 지연은 2건이었다. 복지부에 따르면 신고 사례 중에는 1년 전부터 예약된 자녀의 수술을 위해 보호자가 휴직까지 했으나 입원이 지연된 경우도 있다.
대형병원에서는 급한 대로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교수와 전임의(펠로) 등으로 메우고 있지만 곧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비상 진료 체계를 가동하더라도 2~3주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전날 ‘빅5’ 병원을 포함한 전국 82개 수련병원 소속 임상강사·전임의들까지 입장문을 내고 “현재의 상황에서는 의업을 이어갈 수 없다”며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고수할 경우 전공의들을 따라 현장을 이탈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있는 데다 응급실, 중환자실마저 비우면 4년 전보다 상황이 빠르게 악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공의들의 공백을 임상강사와 전임의가 주축이 돼 메우고 있는 만큼 이들마저 의료 현장을 떠나면 의료대란의 장기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尹 "의대 증원 2000명은 최소 규모…집단 진료거부 안돼"
의대정원 증원을 백지화해야 한다는 의료계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는 2000명의 의대증원 규모가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날 “의료 현장의 주역인 전공의와 미래 의료의 주역인 의대생들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며 의대 증원 규모 조정 가능성을 일축했다.
윤 대통령은 전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료 현장을 떠난 것에 대해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은 국가 안보, 치안과 함께 국가가 존립하는 이유이자 정부에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책무”라며 “의사는 군인·경찰과 같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더라도 집단적인 진료 거부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그동안 정부는 28차례나 의사 단체와 만나 대화하고 사법 리스크 감축, 지역 필수의료에 대한 정책 수가 등 보상 체계 강화, 지역 의료기관에 대한 투자 지원 등을 함께 제시했다”며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정당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19일 오후 11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을 점검한 결과 이들 병원 소속 전공의의 55% 수준인 641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이 가운데 831명에게 업무 개시 명령을 내리고 복귀하지 않으면 면허정지 등 법과 원칙대로 대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대란 장기화땐 결국 국민만 피해…정부-의료계 ‘협상의 끈' 놓지말아야
정부는 2020년 의료계 파업에서 물러섰던 사례를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의료계가 집단행동을 지속할 경우 면허 취소 등 법과 원칙대로 대응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와 의료계가 계속 강대강으로 맞서면서 의료대란이 장기화될 경우다. 결국 환자 등 국민들만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명분을 살리는 협상과 대타협으로 이번 사태가 파국으로 가는 길만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가 의정 소통을 통한 협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20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공의 사직 행렬이 본격화한 지 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진료 현장의 과부하는 심화되고 있다. 이날 보건의료노조가 파악한 의료 현장 상황에 따르면 심전도검사, 혈액배양검사, 욕창 드레싱, 비위관 삽입 등을 간호사·임상병리사·방사선사·응급구조사 등에게 전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드레싱 업무는 각 병동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거나 남성 환자의 도뇨관 삽입은 남성 간호사가 해결하라는 식의 지침이 내려온 병원도 있었다. 아무런 교육·훈련도 없이 일반 간호사를 갑자기 진료보조인력(PA) 간호사로 배치해 전공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병원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할수록 현장에 남은 의사들을 비롯해 병원에 근무하는 전 직종이 번아웃에 내몰리면서 궁극적으로 환자와 국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빅5 병원 소속 교수는 “근무시간이 늘어난 데다 심폐소생술(CPR) 등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높다”며 “환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정부가 ‘면허 박탈’ 등 강경 기조로 일관하기보다 전공의들을 돌아오게 해 진료를 정상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의료계에서는 정부가 한 번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고집하기보다 의료계와 합의해 적정 증원 규모를 끌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산부인과·소아과·응급의학과·흉부외과 등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의사 수 부족이 아닌 분배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의료계의 요구대로 수가(건강보험이 병원에 지급하는 돈)를 정상화하고 의료 소송 부담을 낮추는 등 특정 진료과를 기피하는 현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게 급성무라는 지적이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장은 “불가피한 의료사고로부터 보호받고 소아청소년 환자 진료의 특성을 고려한 지원 정책이 마련되는 등 대대적인 지원이 선행되지 않으면 소아과 붕괴를 막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이달 1일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의 경우 현장에서 체감할 만큼 구체적이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배희준 대한뇌졸중학회 이사장(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은 “향후 전문의가 될 수 있는 필수 의료 분야 전공의 증원이 선행되지 않으면 정부가 추진하려는 전문의 중심의 진료 시스템이 구축되기 어렵다”며 “전공의들의 수련 환경부터 전문의들의 근무 여건에 이르기까지 뇌졸중 분야 지원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도 의사들의 집단 진료 중단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안심하고 치료받아야 할 환자와 가족들을 극심한 피해와 고통으로 몰아넣는 의사들의 집단 진료 거부는 하루빨리 중단돼야 한다”며 정부에 “의사들을 자극하는 강경 대응으로만 일관할 것이 아니라 필수의료·지역의료 살리기 협의체를 조속히 마련해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