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금융 투자 잔혹사’ 왜 반복되나

금융사 탐욕·감독 실패·묻지마 투자등

삼각 파도에 홍콩 ELS 수조원대 손실

총선 앞두고 '선제 자율배상' 압력까지

개선노력 없으면 더 큰 재앙 닥칠 수도

이혜진 논설위원이혜진 논설위원




3조 원? 5조 원? 아니면 10조 원?



시한폭탄과 같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총손실 규모는 아직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올 들어 이달 16일까지 확정된 손실만 6500억 원이 넘는다. 지난해 11월 기준 홍콩 ELS의 판매 잔액은 19조 3000억 원이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15조 4000억 원 중 6조 원이 넘는 상품이 이미 손실 구간에 진입했다. 홍콩 증시의 극적 반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수조 원대의 손실 쓰나미가 불가피하다. 라임펀드(1조 5380억 원), 독일 국채 파생결합펀드(DLF·7950억 원), 옵티머스펀드(5084억 원)는 물론이고 2013년 동양그룹 채권 사태(1조 7000억 원)를 넘을 만한 역대급 손실액이다. 국민 재테크 상품이 ‘국민 재앙 상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2019년 11월 금융위원회는 독일 국채 DLF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고강도의 투자자 보호 방안을 내놓았다. 당시 대형 시중은행 두 곳에서 판매한 DLF의 평균 손실률은 53%였고 일부는 사실상 전액 손실을 기록했다. 은행 상품이 이 정도로 충격적인 손실을 낸 사례가 없었고 불완전판매 정황이 심각해 금융 당국은 극약 처방을 썼다. 당국은 원금 손실 가능성이 20%가 넘는 구조화 상품 등 ‘고난도 금융 상품’을 은행에서 아예 팔지 못하게 하는 초강수를 뒀다. 고위험 사모펀드는 물론이고 도마 위에 자주 올랐던 신탁도 금지 대상에 포함됐다.



그런데 한 달 뒤 신탁이 규제 대상에서 나 홀로 빠졌다. 은행들은 “투자자 보호 강화 노력을 전제로 지수 연동형 ELS 신탁 판매는 허용해달라”고 간청했다. 금융위는 “미국·일본·한국·유럽·홍콩 등 5개 증시의 지수만 기초 자산으로 삼으라”는 조건을 달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투자 권유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고 내부통제 장치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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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ELS 사태의 씨는 그렇게 뿌려졌다. 물론 고위험 상품 판매 규제를 일부 푼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과도한 규제는 소비자의 선택권, 금융투자 시장 선진화의 걸림돌이다. 당시 규제 완화의 조건이었던 소비자 보호 노력과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잡초의 씨가 있어도 관리를 잘하면 정원은 망가지지 않는다. 장외 파생 상품 성격의 ELS가 예금 대용 상품으로 홍보되며 일선 은행 지점까지 광범위하게 팔린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자산가들의 분산투자 수단이 됐어야 할 파생 상품이 전국의 은행 판매망을 타고 90대 노인에게까지 팔려나갔다. 금융사의 방종, 이를 방치한 당국의 합작품이다. 자기 책임 원칙 따위는 없이 ‘묻지 마’ 가입을 한 투자자들 역시 남 탓만 할 수는 없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선수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감독의 책임이 더 막중한 것은 축구뿐 아니라 금융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슬그머니 풀어둔 작은 잠금장치 하나가 큰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융이다. 사모펀드 규제 완화는 라임·옵티머스 사태의 토양이 됐다. 탐욕은 느슨한 규제를 비집고 금융 리스크를 키운다. 산업의 속성을 고려해 금융 당국에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돼 있다. 자동차는 액셀만으로 목적지에 갈 수 없다. 브레이크도 적절히 밟아줘야 사고 없이 안전 운행이 가능하다. 금융 당국이 규제를 풀어 금융 산업을 육성하고 모험 자본 조달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을 권한과 책임을 제대로 짊어져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금융 감독 당국은 수십만 명의 ELS 투자자들의 불만이 분출하자 선제적 배상안을 마련하라고 금융회사들을 독촉하고 있다. 불완전판매의 여부와 수위가 아직 제대로 가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단 금융사의 ‘자율 배상’을 강요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한다. 금융사와 소비자의 과실을 정확하게 가려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감독 당국의 당연한 역할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규제 완화, 금융사의 방종과 감독 실패, 대규모 손실 그리고 배상 독려’라는 반복되는 금융 잔혹사를 끊어내려면 정책 당국의 자성이 필요하다. 홍콩 ELS를 뛰어넘는 역대급 사태는 또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이혜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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