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병원에서 도저히 인력이 안 되니까 인턴 업무를 간호사에게 하도록 하고 있어요. 의사 부족에 따른 환자 불만도 모두 떠안게 돼 정신적으로도 힘드네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 제출 및 근무 중단에 돌입한 지 사흘째인 22일 의료 현장에 남은 간호사들이 의사 업무를 대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고유 업무에 의사가 담당해야 할 일까지 더해져 피로감이 누적된 간호사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폭주했다.
전공의들이 떠난 서울의 한 상급병원 간호사 A 씨는 “욕창 드레싱 같은 경우 아침에 레지던트가 회진을 돌면서 하는데 추가 요청을 간호사에게 하라는 공지가 이미 내려왔다”며 “간호사들이 의사들의 업무를 하는 경우도 일부 발생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서울 강동구 소재의 병원에서 근무 중인 한 임상병리사는 “전공의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니 간호사 선생님들의 업무가 상당히 과중해졌다”고 털어놓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간호사 등 의료 종사자들의 불만이 번지고 있다.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게시글을 작성한 한 간호사는 “의사 업무를 덮어쓰고 환자가 잘못될 경우 법적으로 간호사가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턴 업무 일부를 전공의도 하고 있는데 전공의 업무도 많고 바빠 즉시 해결하지 못한다”며 “지연에 대한 컴플레인은 간호사들이 다 듣고 즉시 필요한 처치도 지연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간호사는 “수술 동의서 설명은 원래 전공의가 하는데 간호사가 하는 중”이라며 “내일 아침에는 또 얼마나 동의서를 받으러 다닐까”라고 적었다.
간호사 본연의 임무 밖의 업무를 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도 민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현재 간호사들에게 떠넘겨진 업무들은 원래 의사들이 하는 일이고 일손이 부족하면 의사의 지시와 관리·감독하에 간호사들이 수행할 수는 있다”며 “현재 각 병원에서 관련 민원이 접수되고 있는 상황이라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전공의 파업으로 의료 현장에서는 EKG(심전도 검사), ABGA(동맥 혈액 가스 검사), Blood culture(혈액 배양 검사), pcd(경피적 카테터 배액술), Dx(욕창 드레싱) 등을 간호사·임상병리사·방사선사·응급구조사 등에 전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 간호사를 교육 없이 PA 간호사로 배치하는 병원도 있다. PA 간호사는 의사 면허 없이 의사로서 가능한 업무 중 일부를 위임 받아 진료 보조를 수행한다. 다만 현재 불법인 PA 제도의 경우 간호사들의 합법화 요구와 정부의 제도화 추진 검토에도 의사 단체가 반발해 무산된 바 있다.
응급 환자를 병원 응급실로 이송하는 데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전날 남편과 함께 구급차를 이용해 응급실을 찾은 최 모 씨는 구급대원들에게 상급병원에는 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들이 여러 병원에 전화를 걸고 20여 분 동안이나 이송 가능 여부를 문의했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동신병원에 입원 중인 또 다른 환자 문 모 씨도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상황을 목격했다. 문 씨는 “평소 같으면 야간에 1~2팀 오던 게 어제는 5~6팀이 들어왔다”면서도 “입원을 하지 못해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특히 야간에는 구급대원들이 밖에서 계속 전화를 하면서 환자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을 봤다”고 설명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따르면 현재 대부분의 전공의들이 몰려 있는 상급종합병원들은 경증 환자 수용을 자제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소방은 이송이 어려운 병원에 대해 현장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이송이 가능한 인근 병원으로 환자를 인계하고 있지만 몰리는 응급 서비스 수요로 원활한 환자 분배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1일 오후 10시를 기준으로 전국 주요 100개 수련병원에서 전공의 927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중 8042명이 근무지를 이탈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6038명에 대해 업무개시명령이 발령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