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파묘'에 나왔던 그 ‘00’…진짜 있었을까

일제 '쇠말뚝 전설' 두고 논란 분분

김영삼 정부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

쇠말뚝 제거 사업…시민단체도 가세

최근 "측량용 말뚝" 목소리 높아져

‘파묘’ 스틸컷. 사진 제공=쇼박스‘파묘’ 스틸컷. 사진 제공=쇼박스





※영화 ‘파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기사입니다.





‘파묘’ 스틸컷. 사진 제공=쇼박스‘파묘’ 스틸컷. 사진 제공=쇼박스


일제가 우리 명산에 쇠말뚝을 꽂았다?…'역사 바로 세우기'의 노력들


영화 ‘파묘’가 누적 관객수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차가운 겨울이었던 영화계에도 훈풍이 불고 있습니다. 불과 개봉 8일 만에 400만 관객 수를 돌파한 만큼 영화 속 캐릭터와 줄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애정이 뜨겁습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한 집안의 ‘파묘’를 두고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다룹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우리 민족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명산에 쇠말뚝을 꽂았다는 소위 ‘풍수 침략’이 언급되는데요. 풍수 침략과 쇠말뚝은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혈맥을 누르기 위해 일제가 쇠말뚝을 꽂았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숙한 소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항간에 퍼진 전설처럼, 실제로 전국 산 속 곳곳에서 말뚝처럼 생긴 쇠침이 발견되곤 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가 공식적인 공론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정부 때의 일입니다.

1995년 2월 15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쇠말뚝 제거 사업을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 추진 사업으로 의결합니다. 정부가 일제가 전국에 꽂은 쇠말뚝의 존재를 인정하고 제거하는 일을 국가적인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는 이를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습니다.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당시 정부의 브리핑 자료를 볼까요? 이후 정부는 ‘문민정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김영삼 정부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함께 쇠말뚝 제거 사업과 일제 변경 고유지명 되찾기, 경복궁 원형복원 사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1995년 2월부터 전국의 시·군·구별로 실태조사를 벌여 모두 118개의 쇠말뚝을 확인,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뽑은 쇠말뚝은 해당 지역 주민에게 전시한 후 역사적 유물로 영구히 보관할 계획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쇠말뚝 제거작업을 실시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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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로 넘어간 뒤에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됩니다. 정부 주도 사업에서 시민단체와 시민들로 중심축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시민단체 민족정기선양위원회의 경우 1985년부터 30여 년간 300개가 넘는 쇠말뚝을 뽑았다고 하죠. 전국 팔도에서 쇠말뚝을 뽑았다는 증언과 증거가 잇달았습니다.

“단순한 토지측량용일 뿐”…쇠말뚝 전설이 전하는 ‘민심’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쇠말뚝 전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쇠말뚝은 일제가 한국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악의적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측량용으로 설치한 말뚝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조선의 국토에서 다양한 식민지 건설 사업을 전개하던 일제가 험준한 산을 측량하기 위해 묻어둔 것이 구전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주민들이 풍수를 위해 직접 설치한 말뚝이라는 주장, 군부대가 사용한 물건이라는 주장 등이 이어졌습니다.

영화 ‘파묘’에서도 이러한 목소리를 비춥니다. 쇠말뚝을 언급하는 지관 ‘상덕(최민식 분)’에게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이 “99%는 가짜”라고 반박하는 데서 알 수 있죠. 한때 정부까지 나서 진행했던 쇠말뚝 제거 사업이지만, 뚜렷한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한국에서 쇠말뚝 전설과 유사한 풍수단맥설이 제기된 건 처음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외부인에 의해 조선의 맥이 끊겼다고 하는 기록이 꾸준히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명군이 선산(善山)을 보고 지맥이 뛰어나 이를 시기해 숯과 쇠말뚝을 박아서 이를 끊어 놓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후 선산에서는 인물이 나지 않았다고 하죠.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더욱 더 앞으로 거슬러 가면, 고려 공민왕 시절에도 쇠말뚝이 사용되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노자키 미쓰히코 교수는 관련 논문을 통해 한국사 속 쇠말뚝 설화를 정리하면서 “한국에 있던 철기신앙에 풍수신앙이 침투하면서 쇠말뚝에 의한 단맥설로 수용되어 전국에 유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일제는 풍수가 좋은 터에 쇠말뚝을 묻어 조선의 얼을 빼앗으려 했을까요? 풍수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두고 수많은 논쟁과 토론이 오가는 한 쉽게 정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일 듯합니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쇠말뚝 전설에 담긴 당시 민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설령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풍수신앙이 결합되어 탄생한 전설에 불과할지라도, 당시 조선의 사람들이 수많은 차별과 설움을 견뎌왔다는 점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땅은 농경 민족인 한국인들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빠르게 도시로 이주하고 있는 현재에도 풍수지리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곧 500만 관객을 달성할 영화 ‘파묘’의 인기는 이를 증명하는 것일 테지요. 3·1절 105주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화제가 된 쇠말뚝 전설의 배경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박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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