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스마트폰 중독 예방’이 저출생대책?…백화점식 대책 바꿔야

◆2023년 저고위 계획 전수조사

329건 중 22%가 연관성 떨어져

"각 부처 의견 모아둔 수준" 지적

AI 교과서·대입 정책까지 포함시켜

저고위에 예산·인사권 부여 필요

서울 시내 한 어린이집. 연합뉴스서울 시내 한 어린이집. 연합뉴스




정부가 시행 중인 ‘저출산·고령사회 세부 대책’ 가운데 70여 건이 저출생과 무관하거나 연관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향후 정부가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21~2025)’을 수정할 계획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사업부터 솎아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4일 서울경제신문이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에 따른 2023년도 중앙부처 시행 계획을 전수조사한 결과 전체 329개 세부 사업 중 73건이 저출생과 관련이 낮은 사업으로 확인됐다. 사업별로 살펴보면 청소년과 사회 초년생을 대상으로 재무·금융 교육을 제공하는 사업이 저출생 대책에 포함됐다. 사업 취지는 청년 세대의 자산 축적을 유도하고 보이스피싱과 같은 금융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청년 정책으로는 필요할지 몰라도 저출생과 직접적 관계는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처 주요 대책 중 하나인 일하는 방식 및 문화 혁신 사업도 비슷하다. 중소기업에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와 원격 재택근무 체계를 구축해주는 이 사업은 저출생 정책이라기보다 중소기업 지원 정책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원 목표 기업 수도 700곳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 △스마트폰 중독 예방 △직장 내 성희롱 구제 방안 △인공지능(AI) 역량을 갖춘 창의 인재 육성 △AI 디지털 교과서 활동 △성 피임 교육 등도 저출생과의 연관성이 낮은 것으로 분석된다. 노동시장 성별 격차 현황 조사와 재직 여성의 경력 단계별 리더십 강화 등도 큰 틀에서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1차적인 대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부총리급인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취임 직후 성과 평과에 기반한 정책 구조조정을 시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의 체계는 각 부처에서 저출생 정책으로 소위 꼬리표를 달아서 제출한 것들을 모아둔 수준으로 문제가 많다”면서 “부처 입장에서는 저출생 사업이라고 하면 예산을 지켜낼 수 있는 만큼 저출생 해결이라는 큰 정책 목표보다는 가까운 부처 이익에 사로잡히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간한 ‘2023년도 저출산·고령사회 중앙부처 시행 계획’에서는 청소년 인터넷·스마트폰 과도 의존 예방 및 해소가 저출생 대책의 하나로 제시돼 있다. 이 사업은 청소년의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해 이용 중독에 빠질 수 있는 위험군을 찾아내 적절한 상담과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진단 조사도 벌인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청소년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이 사업을 통해 출생아가 늘어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저출생 대책으로 제시된 사업 중에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사업도 있다. 2025년까지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기 위해 시범 교육청을 선정하고 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뼈대다. 저출생 상황 극복과 관련성을 찾기 어렵지만 국정과제이자 교육부 10대 핵심 정책이라는 이유와 함께 저출산·고령화 정책 시행 계획에 이름을 올렸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저출생 꼬리표가 달리면 부처 입장에서는 사업 유지 측면에서 유리한 부분이 있다”며 “저고위도 별다른 권한이 없다 보니 각 부처의 대책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백화점식 대책만 반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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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대책 중에는 대입 정책도 있었다. 각 대학 학생부 종합 전형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입학 전형 자료에서 자기소개서를 제외하고 사회 통합 전형 모집 비율을 규정하는 내용 등이다. 장기적으로 입시 경쟁을 완화해 출산에 대한 사회 인식과 부담을 낮추려는 의도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정부는 당장 이듬해 입시 정책에 초점을 맞췄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나 직장 내 괴롭힘 근절도 저출생 대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행 계획에 포함됐다.

단순 인증 제도나 포상과 관련된 사업도 들어가 있다. 고졸 채용 성과가 뛰어난 기업을 ‘인적 자원 개발 우수 기관’으로 인증하거나 세대 간 소통 활성화를 위해 효행자 및 효 기여 단체에 포상을 하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저출생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 같은 보여주기식 대책은 시급히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으로 처음으로 0.6명대에 진입했다. 이대로라면 올해 연간 합계출산율도 0.6명을 찍는 것이 확실시된다. 정책의 회임기간을 고려하면 남은 시간이 많이 없다는 뜻이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런 정책들도 몇 단계 거쳐 연결시키면 저출생 대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서 간호사 등 관계자가 신생아들을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서 간호사 등 관계자가 신생아들을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도 이런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저고위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저출산·고령화 정책을 ‘5대 핵심 과제’로 추렸다. 구체적으로 △질 높은 돌봄과 보육 △부모에게 아이와 함께할 시간 보장 △가족 친화 주거 서비스 △양육 비용 경감 △건강한 아이 5개 과제를 핵심 정책 분야로 지정해 이를 반영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2021~2025)’을 새로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정부 안팎에서는 지금까지의 저출생 정책의 효능이 낮고 나열식 정책이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로 저고위의 권한 부족을 꼽는다. 이 때문에 파격적인 저출생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저고위의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원 인구모니터링평가센터장은 “저출생 대책을 작은 사업 단위로 모아 보지 말고 핵심 대책 위주로 큰 기조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관련 인력을 저고위가 흡수하는 방안도 아이디어로 거론된다. 이 교수는 “시행 계획은 정책적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각 부처가 제출한 것을 모은 형태”라며 “지금의 (저고위) 구조로는 저출생 대책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스스로 책임을 가질 수 있는 정책 기구가 돼야 한다”며 “(저고위가) 저출생 대책을 그냥 묶어서 내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기적으로는 저고위가 저출생 관련 예산과 인사권을 보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백화점식 대책과 실효성 부족한 사업을 정리해야만 한다”며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특정 부처에 업무가 집중된 게 아니라 모든 부처 사업과 다 연계돼 있는 만큼 컨트롤타워가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모든 부처의 사업을 꿰뚫고 있으면서 예산을 편성·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세종=주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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