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韓, 기술·인재 다 뺏기고 개인정보까지 무방비…"경제안보법이 없다"

[무방비 경제안보]<1>

글로벌 '신보호주의' 트렌드 속

日·中·EU 총괄 대응책 법제화

경제안보 개념조차 못 세운 韓

첨단기술 유출 등에 '속수무책'





미국 하원이 13일(현지 시간) 안보 우려를 이유로 중국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을 미국에서 내려받지 못하도록 하는 퇴출 법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352표, 반대 65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됐다. 유럽 역시 국가 안보 이슈가 뒤덮고 있다. 미 애플이 시장 지배력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빅테크’ 업체까지 정조준하고 있다.



신보호주의는 글로벌 트렌드다.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의 무역기술장벽(TBT) 건수는 4079건으로 처음으로 4000건을 돌파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4일 “미국 보호주의가 유럽으로 퍼지면서 각국이 보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며 “서로가 기술과 인력을 빼가는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중 갈등과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공급망 재편과 신보호주의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경제안보 위협이 현실화하고 있지만 한국은 체계적인 대응을 위한 법적 기틀조차 미비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해외 기업들의 국내 반도체 기술·인력 빼가기가 성행하고 알리익스프레스 같은 중국 업체의 한국 공습이 이뤄지고 있지만 경제안보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무방비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국의 상황은 다르다. 일본은 2022년 발표한 국가안보 전략에 경제안보를 핵심 요소로 내세웠다. 유럽연합(EU)은 대외통상정책 기조에 기술 보호와 외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한 구체적인 보복 절차를 도입했다. 프랑스는 2020년 ‘경제안보 정책에 관한 법령’을 제정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내법에 경제안보에 대한 명시적 정의는 포함돼 있지 않으며 한국의 경제안보 전략이 주요국들에 비해 늦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중은 약 80%다. 경제안보 없이는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종합적 대응이 부족하다 보니 최근 5년간 기술 유출만 96건에 달한다. 해외 기업들의 개인정보 탈취에 대한 대응책도 부족하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EU와 중국은 자국 국민의 개인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지만 한국은 손을 놓고 있다”며 “법적 장치를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적과 아군 구분없는 경제전쟁…초격차로 협상력 확보해야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신보호주의 기조가 확산하면서 기술·인력 쟁탈전이 격화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과 우수 인력은 중국 같은 후발 주자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미국도 탐을 내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도 제조업 리쇼어링과 함께 경쟁적으로 산업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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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업체들의 국내 시장 공략도 거세지고 있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같은 중국 플랫폼 업체들은 한국 시장에 경쟁적으로 뛰어들면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저가를 무기로 한 물량 공세에 국가 경제의 핏줄과 같은 유통망을 내어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14일 국가정보원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9~2023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종에서 산업기술 해외 유출이 적발된 건수는 각각 38건과 16건에 이른다. 이들 두 업종만 54건으로 총 96건의 56%에 달한다. 특히 반도체 산업기술 해외 유출 적발 건수를 연도별로 보면 2019년 3건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15건으로 대폭 늘어났다.

이미 글로벌 기술·무역 시장은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글로벌 기술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중국에 대한 25%의 보복 관세를 부과한 게 신호탄이 됐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면서 백신과 무기 등 기술 자립의 중요성은 각국의 보호주의에 불을 붙였다. 신보호주의는 적과 아군 구별이 모호하다. 유럽은 이달 6일 전면 시행한 디지털시장법을 통해 미국의 애플과 구글, 중국의 바이트댄스(틱톡)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을 모두 겨냥하고 있다.

中플랫폼, 저가무기로 유통망 장악
유럽 ‘디지털시장법’美中동시 겨냥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보조금과 수출통제 등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 미국 반도체법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에 반도체 보조금(390억 달러)과 연구개발 지원금(132억 달러)을 포함해 5년간 527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원 방식은 보조금부터 대출, 대출 보증, 세금 공제까지 총동원됐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12월 영국 BAE시스템즈를 시작으로 자국 마이크로칩테크놀리지·글로벌파운드리 등에 돈을 풀기로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미국의 자국 기업 우선주의가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유럽연합 등도 맞불을 놓고 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산업 지원에 1조 위안을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2000억~3000억 위안으로 추정되는 국영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EU는 현재 10% 수준인 유럽 기업의 반도체 세계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며 2030년까지 430억 유로(약 61조 원)를 투자한다.

선거 앞둔 美, 자국 우선주의 열올려
사면초가 몰린 韓, 보조금 등 열세


한국은 사면초가다. 글로벌 기술·인력 쟁탈전에서도 뒤처져 있으면서 보조금 지급 전쟁에서도 열세다. 전문가들은 결국 기술 초격차를 더 벌리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과 견줘 D램에서 5년 이상, 낸드에서 2년 안팎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 대선 과정에서 양대 후보가 더 강한 중국 견제책을 내놓을수록 우리로서는 미국마저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며 “한국의 경제 안보 상황은 한마디로 사면초가이며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실질적인 해결책은 우리 기업들이 기술력에서 초격차를 가지는 방법밖에 없다”며 “시스템반도체 설계에 있어서도 초격차를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술력 강화·호주와 공급망 협력을”


경제 안보를 위해 외국인 투자 심사를 강화하고 산업 정책의 제도화에 신경 써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안정적인 공급망과 시장 확보를 위해 호주와의 파트너십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리튬과 니켈, 코발트 등 핵심 광물에 대한 대중국 수입 의존도가 2018년 14%에서 2023년 21.6%로 크게 상승했다. 같은 기간 수입액은 42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두 배 이상 불어났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우리나라가 메모리 분야에서 지배력을 바탕으로 다른 분야 무역 보복에 대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며 “자원 부국인 호주와 같은 나라는 상호 투자 등을 통해 파트너십을 강화해 안정적인 경제 안보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송종호 기자·세종=유현욱 기자·세종=이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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