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던 메모리반도체 업계가 인공지능(AI) 수요를 등에 업고 반등하고 있다. D램 제조사들은 미국 ‘빅테크’들이 주목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주축으로 치열한 AI 메모리 기술 고도화 경쟁을 벌일 예정이다. HBM 외에도 각종 AI 기기에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메모리 역시 전도유망한 사업으로 꼽히고 있다.
◇AI 업고 올해 실적 ‘업턴’ 준비 끝냈다=1분기 들어 AI 훈풍을 탄 메모리 회사들의 실적 약진이 눈에 띄고 있다. 마이크론은 20일(현지 시간) 실적 발표회를 통해 1분기 58억 24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은 1억 9100만 달러로 2022년 3분기 이후 6분기 만에 적자 수렁에서 벗어났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실적 발표와 함께 AI 시장의 성장세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메모리 업계 1위 삼성전자 역시 AI 수요와 전반적인 업황 개선에 힘입어 1분기 흑자 ‘턴어라운드’를 예고했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을 총괄하는 경계현 사장은 20일 열린 회사 주주총회에서 “사업적으로 보면 올 1월부터 적자에서 벗어나 흑자 기조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며 실적 개선에 대한 업계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주인공은 단연 HBM…젠슨 황은 삼성에 주목=이들이 집중하고 있는 AI 메모리 사업의 주축은 단연 HBM이다. HBM은 연산 칩 바로 옆에 장착돼 데이터 처리를 신속하게 보조할 수 있어 AI 시대에 각광 받는다. 최근 SK하이닉스가 주도하던 HBM 시장에서는 경쟁사들의 맹추격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SK하이닉스·삼성전자에 이어 10% 내외의 점유율에 불과한 3위 마이크론이 매섭게 진입하고 있어서다.
2월 마이크론은 자사 8단 5세대 HBM(HBM3E)이 엔비디아의 최신 AI용 GPU ‘H200’에 탑재될 것이라는 사실을 라이벌 회사들보다 먼저 공개했다. 한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마이크론의 자신감은 여전하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를 통해 “이미 2024년 판매할 HBM 수요가 동이 났다”고 강조했다.
HBM 업계에서는 세계 AI 반도체 1위 엔비디아의 수장 젠슨 황 CEO의 행보도 주목한다. 황 CEO는 아직 엔비디아 HBM 공급망에 진입하지 못한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연일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엔비디아의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4’에 마련된 삼성전자 부스를 찾아 12단 HBM3E에 ‘승인(Approved)’이라는 글씨와 함께 친필 사인을 남겼다. 또 전날 열린 GTC 2024 기자 간담회에서 “현재 삼성 HBM을 테스트하고 있으며 기대가 크다”고도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황 CEO도 GPU의 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고려해 삼성전자가 HBM 공급망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며 “선두 SK하이닉스와 협상 우위를 가져가려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LLW·CXL 등 차세대 AI 메모리 '출격 대기'=AI 시대에 각광 받는 메모리는 HBM뿐만이 아니다. 메모리 3강 회사들은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독특한 형태의 AI 기기 수요에 맞추기 위해 ‘맞춤형’ 메모리 설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예로 데이터 출입구를 늘린 저지연성 와이드I·O(LLW) D램은 외부 환경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연산해야 하는 증강현실(AR)용 D램으로 제격이다. 이미 SK하이닉스는 이 D램을 애플의 비전 프로에 공급한 사례가 있다.
D램의 용량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도 차세대 메모리로 각광 받는다. 최근 삼성전자는 CXL D램에 관한 상표 4개를 출원하고 본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새로운 구조의 메모리 외에 범용 메모리를 활용할 수 있는 AI 반도체 기술도 고려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개발하고 있는 AI 칩 ‘마하-1’이 그 예다. 경 사장은 20일 주주총회 현장에서 마하-1을 소개하며 “HBM보다는 LP메모리를 써서도 대규모언어모델(LLM) 추론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메모리반도체와 GPU 사이의 병목현상을 8분의 1 정도로 줄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