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말 과학기술계의 ‘카르텔’을 언급한 뒤 과학기술계는 혼돈에 빠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존 연구 과제조차 집행이 중단되는가 하면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R&D다운 R&D 생태계’를 만들자는 취지와 달리 과학기술계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대통령실과 정부의 정무적 판단 미흡도 사태 악화에 한몫했다. 하지만 올 2월 과학기술수석실이 대통령실에 신설된 후 과학기술계의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며 반전을 꾀하고 나섰다. 궁극적 목표는 2030년 주요 3개국(G3) 과학기술 강국 도약이다.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8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서울경제신문에서 행한 인터뷰에서 “이달 중 인공지능(AI), 첨단 바이오, 양자기술에 대해 대통령이 이니셔티브(목적 달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를 발표할 것”이라며 “게임체인저 기술을 키워 기술 패권 시대에 단단히 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R&D에 관계되는 부처·기관이 30여 개 되는데 칸막이를 없애 반드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꾀하겠다”며 “각 부처가 5월 말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는 내년 예산안에서 사상 최대의 R&D 예산이 편성되도록 할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요즘 국가전략기술 육성 관련해 대통령실에서 준비하는 게 있나.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것인데 이달 중 AI, 첨단 바이오, 양자과학기술에 대해 대통령이 이니셔티브를 발표한다. 대통령이 이 방향으로 간다, 뭘 어떻게 하겠다 하는 큰 그림을 선언하면 각 부처에서 정책을 뒷받침하게 된다. 각 부처는 민간과 협업해 기존 분절적 R&D 프로그램도 묶어서 구체적인 정책을 펴게 된다. 대통령이 선언하는 범부처 프로젝트다. AI의 경우 AI 반도체 개발을 들 수 있다. AI가 여러 서비스로 연동되고 있는데 해외 빅테크가 장악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미국 증시 시가총액 1위인 것처럼 하드웨어가 받쳐줘야 한다. 우리도 AI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가 강하다. AI반도체 부품 산업을 선점해 대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일종의 ‘반도체 코리아 2.0’이다. 메모리 위주 반도체 산업을 AI칩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첨단 바이오 이니셔티브도 구체적으로 내놓을 것이다. 양자 이니셔티브도 기대해달라.
-반도체 이니셔티브에 방열, 전력 소모 감소, 빠른 속도가 가능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넣었으면 한다.
△AI칩과 함께 같이 검토하겠다.
-첨단 바이오 역시 보건의료·경제·안보의 핵심 아닌가.
△대통령이 최근 청주에서 2035년까지 국내 바이오 산업 생산 규모를 200조 원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전략과 시행 방안을 다듬고 있다.
-올해 국제 공동연구를 지난해보다 3.5배 많은 1조 8500억 원까지 확대했는데 첫해라 자칫 사고가 많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점을 각별히 유념하고 있다. 현재는 부족한 전략을 체계화하고 있다. 우선 유럽의 다자간 R&D 지원 프로그램인 호라이즌유럽 준회원 가입이라든지 정상회담의 과기 분야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우리 돈으로 해외와 공동 R&D에도 나서고 대학 간 연구 협력도 지원할 것이다. 해외 연구자를 연구 책임자로 유치하기 위한 여러 준비도 하고 있다. 공동 R&D의 특허 소유권 문제는 국제 기준에 따르면 된다. 국제 공동연구의 성과 관리 체계를 확실히 만들겠다.
-내년 R&D 예산은 어느 정도 규모로 편성하나.
△지난해 정부 R&D 예산이 31조 1000억 원이었다가 올해 26조 5000억 원으로 4조 6000억 원 줄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부가 올해부터 R&D 예산의 모호한 영역에 있는 항목 중 R&D로 분류했던 것을 비R&D로 이관했다. 그것을 감안하면 실제 지난해 R&D는 29조 3000억 원이었다. 이번에 그 이상 R&D 예산을 편성해 역대 최고로 만들 것이다.
-한국형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다르파)처럼 도전, 모험 연구도 많이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 도전·모험 연구 예산이 6000억 원 이하인데 1조 원으로 늘려 기존 사업도 증액하고 신규 사업도 추진할 것이다. 기초연구,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의 R&D 등 전반적으로 혁신성을 높이겠다. 프로젝트매니저(PM)에게 전권을 주는 등 제도 개선을 강구해 상반기 중 내놓겠다. 기존 R&D 관리 구조와 충돌하는 게 많아 우선 4개 부처, 6개 사업 PM들과 함께 협의체를 출범했다.
-과기수석실에 R&D 정책, AI·디지털, 첨단 바이오, 전략기술 등 4명의 비서관이 있는데 비전과 전략이 무엇인가.
△2030년 G3 과기 강국 도약이라는 비전을 갖고 움직인다. 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 2030년 주요 5개국(G5) 과학기술 강국을 표방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아니라 과학기술력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이다. 분야별로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G5가 다 됐다고 생각한다. R&D 예산 비중이 세계 5위다. 산업 역동성과 첨단 기술력은 독일·일본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그렇게 보는데 우리 스스로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일본·유럽에 동시에 낸 3극 특허가 세계 4위권이다. 다이내믹 코리아를 만들면 못할 게 없다. 과기수석실 인력은 현재 18명에 불과하지만 업무에 따라 힘을 합치는 매트릭스 조직이라 성과가 크다. 대통령을 옆에서 보면 혁신에 관한 이해도가 높다. 과학기술 R&D가 자유 시장경제에서 혁신으로 연결되고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하다. 과기수석실에서 대통령의 철학을 정책으로 잘 구현하도록 범정부적으로 조율하고 각계각층과 소통하겠다.
-과학기술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게 과제다.
△죄송하다. 신규 과제도 줄었지만 계속연구과제가 깎이며 현장의 아픔과 고통이 컸다. 왜 출연연이나 대학, 벤처·스타트업 R&D에서 일괄 삭감으로 접근했느냐는 지적이 많았다. 솔직히 선별적으로 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과기계가 짐을 나눠졌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과기인들이 존경스럽다. 퍼스트무버(선도자) 도약을 위해 내년 사상 최대 예산으로 간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출연연이 공공기관에서 지정 해제됐는데 인사와 연구 문화 등 실질적 변화가 있나.
△출연연의 자율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기관 간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 다만 출연연이 국민의 세금으로 존재하는 만큼 책무를 갖고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산학연의 파괴적 혁신을 어떻게 이끌어내려고 하나.
△대학과 출연연의 연계를 강화하고 벽을 허물려고 한다.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같이 대학부설연구소에 블록펀딩을 지원하도록 해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 출연연의 지역 분원이 상당히 많은데 대학과 같이 글로컬연구소를 활성화해야 한다. 대학과 출연연 간 겸임 근무 생태계도 활성화해야 한다. 중견·벤처기업 연구원과 지역 대학이 협력하는 모델도 좀 더 강화해야 한다.
-현 정부의 R&D 시스템 혁신이 기대만큼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임기 중 반드시 R&D 혁신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수할 것이다. 제 공책에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항목이 현재 20여 개인데 계속 늘려가고 있다. 지금은 빙산의 일각이다. 말은 많이 나왔는데 못했던 것, 예를 들어 R&D 예비타당성 검토의 획기적인 전환이나 이공계 대학원생 스타이펜드(Stipend·연구 생활 장학금) 지원 등 오랫동안 말만 나왔다가 제대로 하지 못한 것들을 연내 모두 끝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판넬로 만들어 과기수석실 공용 공간에 걸어놓았다.
-대학과 출연연의 기술사업화가 잘 안 되고 있다.
△외국에서도 미국처럼 잘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우린 후발 주자지만 일본보다 잘한다. 물론 R&D가 사업화로, 창업으로 더 활성화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교육부·과기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등으로 기술사업화 조직과 예산이 분절돼 있다. 제도도 복잡하다. 다 들여다보고 있고 정비하려고 한다.
-벤처·스타트업계의 사기 진작 방안은.
△벤처·스타트업의 R&D 거품은 걷어냈으니 이번에 증액해야 한다. 다만 중기부가 스마트팩토리라든지 아이템별로 뭘 가져가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이든, 연구소든 창업을 시키고 성장시키는 등 총체적으로 접근했으면 한다.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역동적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부처 간 높은 칸막이를 어떻게 허물고 통합 조정하려 하나.
△우선 과기부 등 10곳 정도는 계속 상황을 파악한다. 과학기술 주제마다 여러 부처와 기관에 흩어져 있는데 통합해서 일을 하도록 조정한다. 농림축산식품부 R&D라면 바이오비서관이 그린바이오를, AI·디지털비서관이 스마트팜을 챙긴다. 산업부·교육부·과기부·중기부와 다 협의한다. 원자력은 과기부와 산업부와 함께 논의한다. 부처가 아무리 협업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데 중립적인 조정자가 중재해줘야 한다.
-의대 증원 등 의료 개혁은 국가 구조 개혁의 일환인데 이공계 황폐화 우려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몇 년 정도는 의대가 인재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공계가 낙심할 것은 아니다. 이공계 대학원생을 과감히 지원하기 위해 기재부·교육부·과기부 간 예산 투입에 합의했다. 젊은층의 마인드를 고려해 이공계 처우와 문화 생태계를 개선할 것이다. 이공계의 창업 대박 사례도 많이 늘릴 것이다. 법무부와 협의해 해외 이공계 대학원생의 졸업 후 비자 연장도 추진하겠다. 일부에서 스타이펜드를 중국·베트남 등에 주면 기술 유출 아니냐는 지적도 하지만 해외 인재를 국내에 정주시키거나 친한파로 만들어야 한다. ‘베트남판 한국과학기술연구원(V-KIST)’ 같은 모델도 다른 나라로 늘려야 한다. 일본처럼 과학기술 공적개발원조(ODA)를 넓혀야 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에 의학 전문 대학원을 신설할 필요가 있는데.
△적절한 시점이 되면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현재는 과기계와 주요 대학에서 공감대를 더 넓혀야 한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존 의대의 혁신도 같이 추진해야 한다.
He is..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화학과 학·석·박사를 한 뒤 영국 서섹스대에서 과학기술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22년부터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경영평가위원, 서울대 과학기술과 미래 연구센터장 등을 거쳐 올 1월 말 대통령실 과기수석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