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기자의 눈] 굴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허진 산업부 기자


최근 국내 인공지능(AI) 연구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매년 전 세계 AI 연구 동향과 연구 인프라 등을 조사하는 미국 스탠퍼드대의 인간중심AI연구소(HAI)에서 발간하는 최신 보고서에 국내 연구계의 한 해 성과가 대거 빠지면서다. 심지어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LG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든 네이버도 빠져 있던 터라 충격이 더 컸다.



이번 일은 AI 산업이 생각보다 더 영미권에 편중돼 있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써내려온 ‘정보기술(IT) 기적’을 다시 한번 재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켰다. 정치라는 방어막을 가진 중국을 제외하고 한국은 거의 유일하게 IT 분야의 자급자족을 이뤄온 나라다. 엄청난 자본력과 전 세계의 두뇌들이 결집해 첨단의 서비스를 내세운 빅테크의 공세 속에 이룬 결실을 기적이 아닌 다른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PC를 중심으로 한 검색 시장에서는 네이버가 구글을 막아냈고 모바일 시대에 넘어와서는 카카오가 왓츠앱 등을 밀어냈다. 하지만 언어 데이터가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AI 기술 경쟁에서 영어권 국가가 아닌 우리는 핸디캡을 갖고 있다. 여기에 자금력 차이까지 더해지면 경쟁 난도는 모바일과 PC 시대를 웃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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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고 했던가. 일각에서는 국내 연구 성과를 담아내지 못하는 이 보고서를 고작 미국 민간 대학에서 발행하는 것이라면서 의미를 깎아내리는 반응도 나왔지만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외면이 아니라 마주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여러 논란에도 보고서에 주목할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한국이 AI 인재 유출국이라는 경고는 무겁게 다가온다. 국내에서 열심히 갈고닦아 구글이나 오픈AI로 나가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학생이나 연구자들은 해외 문을 두드리기 바쁘다는 국내 최고 대학 AI 연구원장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엄청난 자본력을 무기로 밀어붙이는 빅테크의 공세를 막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손놓고만 있을 수 없다. PC와 모바일 시절 글로벌 공룡들이 세계를 삼킬 때 한국이 IT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굴욕을 반격의 계기로 삼을 때다.






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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