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없이 치솟는 달러 값에 엔화 가치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미국의 고물가·고금리·고성장에 따른 ‘3고(高)’ 현상에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시점이 멀어지면서 미국·일본 금리 차를 겨냥한 엔 매도, 달러 매수가 확산한 탓이다.
29일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한때 160엔을 뚫으며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에 최고치(엔저)를 기록했다. 전주 일본은행의 기자회견에서 기대보다 낮은 엔저 견제 심리가 확인되면서 엔화 매도가 늘었고 이날 일본 공휴일로 거래량이 줄어 변동성이 확대된 측면도 있다. 158엔대 진입 이후 정부 개입 및 엔고를 전망한 투기 세력이 엔저 심화로 인한 손실 회피 차원에서 엔 매수 보유액 해소에 나선 것도 또 다른 요인으로 지목된다.
엔·달러 환율은 올해 들어 무섭게 뛰고 있다. 1월 1일 140.89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29일 고점(160.17엔) 기준 넉 달 사이 14%나 올랐다. 지난해 1년 환율이 저점(127.22엔·1월)에서 고점(151.72엔·11월)까지 19% 상승한 것을 고려하면 매우 가파른 속도다. 연일 기록을 깨고 있는 슈퍼 엔저(엔·달러 환율 상승)는 미국의 고금리 지속에 따른 달러 강세의 영항이 가장 크다. 일본은행이 저금리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당분간 유지하기로 한 가운데 미국의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며 양국 간 금리 격차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19일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고 17년 만에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0.1%였던 기준금리를 올려 0∼0.1%로 유도하기로 했지만 인상 폭이 미미해 시장에서는 외려 엔화 매도세를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25~26일 열린 일본은행의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가 동결된 데다 시장이 주목했던 ‘추가 금리 인상’과 관련한 우에다 가즈오 총재의 실망스러운 발언이 환율 급등으로 이어졌다. 우에다 총재는 26일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엔저는 (추가 금리 인상의 판단 요소인)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에 큰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의 금리 인상 폭이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는 데 턱없이 부족한(?) 반면 미국의 인하 전망 시점은 점점 뒤로 밀려나며 강달러가 연출되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지난해 12월 27일 100.99까지 내려간 후 꾸준히 상승해 최근 106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주요 경제지표는 여전히 뜨거운 가운데 올 들어 인플레이션 추세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주 발표된 1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물가지수는 연율 3.1% 올라 지난해 4분기 상승률 1.6%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3월 미국의 비농업 부문 고용은 30만 3000개 급증해 시장 전망치인 21만 4000개를 크게 상회했다.
고물가·고성장에 연준이 한동안 고금리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받으면서 달러 강세에도 불이 붙는 모양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툴에 따르면 6월까지 금리가 동결될 확률은 88.5%로 사실상 상반기 인하론은 사라졌다. 고금리 우려는 다음 달 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더 커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번 FOMC에서 연준은 매파일 것”이라며 “연내 인하가 없다는 신호를 비롯해 심지어 금리 인상을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는 힌트가 나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슈퍼 엔저의 핵심 원인인 ‘강달러’ 기조가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 통화 당국은 환율 시장 개입 시점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재무성이 연일 “과도한 환율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구두 경고를 하고 있지만 시장 견제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엔화 매수라는 직접 개입 없이 구두 개입만으로는 더는 시장에 경계감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앞서 2022년 9월 일본은행과 재무성은 24년 만에 직접 개입을 단행한 바 있다. 9월과 10월 세 차례에 걸쳐 약 9조 2000억 엔을 투입하며 엔화 방어에 나섰고 투기적인 엔 매도를 일부 억제하는 효과를 봤다. 이날도 오전 160엔대를 찍었던 엔화 가치가 오후 154엔대로 급등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시장에서는 “일본 정부가 마침내 엔 매수 개입에 나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무성은 “답변하지 않겠다(노코멘트)”라고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고금리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 개입의 유효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제프리스의 브래드 베첼 외환전략가는 “미일 중앙은행의 전망이 바뀌기 전까지는 엔저 흐름에 대항하는 게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이러한 기조가 바뀌려면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률의 둔화가 미국에서 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크레디아그리콜CIB의 데이비드 포레스터 외환전략가도 “일본 재무성이 이번 주 FOMC를 앞두고 (엔화 매수 개입에 따른) 준비금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