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캔버스에 수없이 많은 눈사람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사람의 모습이 기이하다. 두 덩이의 몸통과 머리가 아니라 세 덩이, 네 덩이 등 형체도 다양한데 대부분의 눈사람 뒤에 ‘불’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불타는 눈사람’은 형용모순이다. 현실에서 눈사람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림 속 눈사람들은 마치 머리띠나 망토처럼 불을 몸에 붙이고 ‘눈사람 세상’을 즐기고 있다. 작품은 노상호 작가가 인공지능(AI)과 협업해 제작한 작품 ‘더 그레이트 챕북 3’이다. AI와 협업했다고 말하면 ‘AI에 명령해 작품을 생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AI 사용’이지 ‘협업’이 아니다. 그렇다면 협업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느 성실한 예술가의 하루 루틴, 1년 365장의 ‘데일리 픽션’을 남기다
17일 서울경제신문 ‘작가의 아틀리에’는 국내에서 아직도 몇 안 되는 ‘AI와 협업하는 작가’ 노상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은 대단할 게 없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한 1인 소호 사무실 같았다.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며 순간의 느낌에 자신을 맡긴 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직접 만난 노상호는 자유는커녕 통제에 가까운 루틴(일과)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다.
노상호는 매일 오전 9시 작업실에 출근한다.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형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기자가 작업실을 찾아갔을 당시 그는 최근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홀리’를 한창 제작하고 있었다. 이 작품이 현재 그의 ‘아침 루틴’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다른 작가들과 다르다. 커다란 철판으로 된 이젤에는 큼직한 흰 종이가 붙어 있고 그 옆에는 A4용지 사이즈의 그림이 붙어 있다. 작은 그림은 작가가 전날 밤에 그려둔 ‘데일리 픽션’이다. 데일리 픽션은 작가가 지난 10년간 거의 매일 A4용지 사이즈의 종이에 그린 드로잉을 말한다.
데일리 픽션의 영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온다. 작가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전 혹은 여가 시간에 인스타그램을 유영한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포착하면 그 이미지를 인쇄한다. 인쇄된 그림 위에 먹지를 대고 트레이싱(따라 그리기)을 하는 게 데일리 픽션의 기본 틀이다. 트레이싱이어도 그림은 원본과 달라진다. 그림을 확대하고 저장하는 과정에서 해상도와 픽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나름대로 이미지 일부를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그림이 탄생한다. 이렇게 만든 데일리 픽션이 아침 루틴의 소재다. 전날 트레이싱한 그림을 보고 그리거나 혹은 하얀 종이에 빔 프로젝터를 쏴 다시 트레이싱한다. 그렇게 수많은 데일리 픽션이 모여 만들어진 1점의 대형 그림이 전시장에 내걸린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입금된 일’을 한다. 그는 “오후에는 전화가 오고 회의를 하기도 한다. 또 실제로 전시장에 갈 일도 있어서 그림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아침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루틴이다.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칼퇴’를 했지만 퇴근 후에도 마냥 쉬는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드로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10년간 계속 드로잉을 했는데 그중 2~3년은 주말에 쉬기도 했지만 무조건 1년에 365장의 그림은 나왔다”며 “아침 루틴으로 대개 한 달에 50호 사이즈 그림 1점 정도를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루틴을 중시하다 보니 무엇이든 꾸밈없이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그는 “나는 작품을 JPG(그림) 파일로 갖고 있는데 실제 회화와 JPG 파일을 동등하게 생각한다”며 “JPG도 나름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원본이라고 생각해 정성껏 제작한 작품이 팔려 나간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이를 ‘전시’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다.
MZ 작가의 파격적 도전 정신, AI와 ‘맞손’을 잡다
이처럼 성실한 루틴은 어쩌면 사람을 고지식하게 만들 수 있지만 노상호는 오히려 파격적 행보를 이어간다. AI와 협업한 최근 작업이 그렇다. 최근 그의 루틴에는 인스타그램에서 발굴한 소재를 생성형 그림 제작 프로그램 ‘미드저니’에 삽입하는 과정이 더해졌다. 우선 작가는 SNS에서 찾은 이미지를 프로그램에 삽입한 후 AI에 이 그림을 설명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AI가 내놓은 설명을 다시 그 프로그램에 명령어로 ‘복사·붙여넣기’한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은 황당하다. 자신이 설명한 원본 그림과 전혀 다른 그림을 내놓는데 그마저도 오류투성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 바로 ‘홀리’ 연작이다.
‘홀리’ 연작은 대부분 AI가 내놓은 오류를 이용한 작품이다. ‘손가락을 그려달라’고 주문하면 손가락이 6개 있는 손을 내놓는가 하면 ‘아기 곰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얼굴이 세 개 달린 괴상한 아기 곰이 있는 그림을 제시한다. 작가는 “제 작품은 SNS 속 이미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2022~2023년 사이에 SNS에서 미드저니가 내놓은 오류 그림을 많이 보게 됐다”며 “내가 아날로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디지털 세계 속 오류를 보면서 인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많은 미드저니 이용자들이 녹아내리는 눈과 불타는 지구 이미지를 주문했을 테고 그 결과 미드저니가 내놓은 오류가 바로 작가의 홀리에 등장하는 ‘불타는 눈사람’이다. 작가는 “AI의 오류를 인지했을 때 ‘신의 세계’를 느꼈고 AI와 협업한 작품의 제목을 ‘홀리’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작품으로도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 작가가 굳이 바쁜 일과 속에 AI라는 예술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신기술까지 더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작가라면 누구나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17일부터 일본 갤러리서 개인전…28~29일 서울포럼 2024에서도 만나볼 수 있어
작가는 홍익대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사진 이미지를 트레이싱하는 그의 작업 방식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방식은 기발하지만 자칫 기성작가들에게 좋지 못한 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30대의 작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또한 “우리 또래의 삶은 대부분 SNS 속에 있다”며 “그걸 보고 그리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MZ다운 과감한 발상 덕분에 최근 10년간 노상호는 많은 미술 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2014’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미술관 전시에 참여했고 인디밴드 ‘혁오’의 앨범 재킷을 제작하며 이름을 알렸다. 17일부터는 일본 도쿄 소재 갤러리 유키코미즈타니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 ‘고스트 브러시’를 개최한다. 이곳에는 그가 2011년부터 매일 제작한 데일리 픽션을 모은 ‘더 그레이트 챕북3’ 연작 6점과 ‘홀리’ 연작 11점, 데일리 픽션(90점 연작) 등 18점의 작품이 내걸릴 예정이다. 28~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서울포럼 2024’에서는 작가의 작품 3점을 만나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손가락이 6개 있는 그림과 3D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한 작품 등 ‘홀리’ 연작 2점과 영상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