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며 내세운 첫 번째 이유는 ‘특검법이 삼권분립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특검법이 여야 협의도 없이 야당의 일방 처리로 통과된 사실을 강조한 셈이다. 여당도 “야당의 입법 독주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라고 대통령실을 엄호했다.
반면 야당은 “대통령의 대국민 전쟁 선포”라며 규탄 대회에 이어 대규모 장외 집회를 예고했다.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예정된 28일 특검법 재표결을 추진하는 더불어민주당은 부결되더라도 22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다시 추진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채상병특검법 거부권 행사에 대한 이유로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점 △특검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점 △수사 공정성과 중립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점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정 실장은 “삼권분립 원칙상 특별검사에 대한 대통령 임명권이 보장돼야 하지만 이 법안은 특검 후보자 추천권을 야당에만 독점적으로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건의 대국민 보고’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실시간 언론 브리핑도 하도록 하고 있다”며 “국회가 오히려 인권 침해를 법으로 강제하는 독소 조항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여당도 “여야 합의도 없는 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헌법상 방어권은 보장돼야 한다”고 거들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야당이 입법권을 남용해 행정부 권한을 침해할 경우 최소한의 방어권이 재의요구권”이라며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거부권을 11번 행사한 바 있고 이스라엘 안보 원조 지지 법안 역시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면서 거부권 행사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야권은 그러나 “헌법상 권한을 남용해 위헌·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윤 대통령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날 범야권 6개 정당과 시민사회가 함께 연 ‘채상병특검법 재의 요구 규탄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을 거부하면서 범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자백한 것”이라고 쏘아 붙였다. 그는 “범인임을 자백했으니 이제 그 범행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냐”며 “윤석열 정권을 확실하게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윤 대통령이 검찰 독재를 넘어 행정 독재를 일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황운하 조국혁신당 원내대표는 “자신과 배우자에 대한 수사를 막기 위한 거부권 행사는 위헌적 탄핵 사유”라고 압박했다. 김용민 민주당 수석부대표도 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탄핵’ 가능성을 언급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25일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장외 집회도 벌일 계획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채상병특검법이 다시 국회로 넘어와 여야는 21대 국회 종료를 일주일 앞두고 첨예한 대치에 돌입했다. 민주당은 28일 본회의를 열어 특검법 재표결을 강행한다는 목표다. 재표결 시 가결 요건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다. 현재 재적의원 295명이 전원 출석할 경우 197명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야권 의석은 180석에 그친다.
지금까지 여당에서 채상병특검법 재표결 시 찬성 입장을 밝힌 의원은 안철수·김웅·유의동 등 세 명이다. 여당 지도부는 ‘단일대오’를 내세우며 이탈표 단속을 이미 마쳐 재의결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야권이 21대 국회에서 부결되더라도 22대 국회에서 곧장 법안을 재발의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채상병특검법을 둘러싼 대치 정국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2대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내정된 우원식 민주당 의원도 이날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로 인한 삼권분립 훼손에 22대 국회는 단호히 맞설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채상병특검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밝혔다. 범야권이 192석을 차지한 22대 국회에서는 여당 이탈 표가 8표 이상이면 대통령 거부권은 무력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