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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그 후…대중의 품에 안긴 역사적 작품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

국현에 기증된 구상작 중 153점 엄선

2021년부터 기증품 비중 급격히 늘어

전시 다양화 등 공익적 순기능 이어져


1960년대 이후 추상화가 현대 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구상화는 구시대 미술로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도 구상화의 영역에서 착실하게 독자적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소중한 작가들이 많다. 어렵고 난해한 추상화 대신 현실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구상 작품으로 자신의 취향을 채우는 컬렉터들도 여전하다. 공공 미술 기관은 추상화 일색인 미술계에서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한 기획을 통해 소개해 전시의 다양화에 기여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쉽진 않다. 학술적 가치를 가진 구상 작품은 대개 가격이 비싸 대여나 구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와 소장자들의 작품 ‘기증’이 중요한 이유다.

지난달 2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은 미술관에 기증된 1960~70년대 구상회화 153점을 작가별로 소개하는 기증의 순기능이 잘 드러난 의미 있는 전시다.




김춘식의 ‘포구(浦口)’ 1977,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5×112cm, 이건희컬렉션.김춘식의 ‘포구(浦口)’ 1977,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5×112cm, 이건희컬렉션.




도상봉의 ‘백일홍’,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24.7×33.5cm, 이건희컬렉션.도상봉의 ‘백일홍’,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24.7×33.5cm, 이건희컬렉션.



전시된 작품 153점 중 104점은 2021년 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소장작이다. 지난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증품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이건희 컬렉션에 영향받은 작가, 소장자들이 연이어 기증 행렬에 나선 덕분이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195점, 한운성 등 작가들의 기증 173점, 작가 유족의 기증 183점 등 2021년 한 해 총 2134점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3년 12월 기준 전체 소장품 1만1560점 중 절반이 넘는 6429점(55.6%)을 기증품으로 채웠다. 이병규와 윤중식의 유족들은 이건희 컬렉션에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된 것을 알고 같은 해 하반기에 각각 13점, 20점을 추가 기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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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1부는 ‘한국 구상 미술의 토양’, ‘새로운 의미의 구상'으로 구성된다. 해방 전에는 서양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 기관이 없었다. 국내 1세대 유화 작가들은 일본의 근대식 미술학교에서 배운 서양 미술을 국내에 전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1950년대 한국 화단에 추상 미술을 표방하는 서구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작가들은 불안을 느끼지만, 구상 회화가 한국의 사회적 토대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을 채운다고 여기며, 고집스럽게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1부에 전시된 작품에는 이 같은 작가들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있다. 세밀한 관찰과 데생을 바탕으로 ‘여인좌상’을 완성한 김인승은 “무엇보다도 인물화의 본질은 인간 성격의 표현에 있다”며 얼굴 묘사에 정성을 쏟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붉은 원피스의 여인’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인승의 ‘붉은 원피스의 여인’, 1965, 캔버스에 유화 물감, 91×74cm, 이건희컬렉션김인승의 ‘붉은 원피스의 여인’, 1965, 캔버스에 유화 물감, 91×74cm, 이건희컬렉션


인물이나 정물에서 벗어나 당대의 현실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며 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도 있다. ‘그림은 생활에서 우러나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며 풍경을 과장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김형구(어부의 가족)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특색이 담긴 산천초목의 모습과 각 지역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상을 화면에 담아낸 김춘식(포구) 등이 대표적이다.

김형구의 ‘어부의 가족’,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2.5×145cm, 동산박주환컬렉션김형구의 ‘어부의 가족’,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2.5×145cm, 동산박주환컬렉션


윤중식의 ‘금붕어와 비둘기’,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61×72.8cm, 유족(윤대경) 기증.윤중식의 ‘금붕어와 비둘기’,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61×72.8cm, 유족(윤대경) 기증.


어린 아들(기증자 윤대경)의 모습을 담은 윤중식의 작품 '소년과 정물'을 보고 있는 어린이들. 이건희컬렉션, /연합뉴스어린 아들(기증자 윤대경)의 모습을 담은 윤중식의 작품 '소년과 정물'을 보고 있는 어린이들. 이건희컬렉션, /연합뉴스


반면 2부 ‘새로운 의미의 구상’에서는 학술적 화풍의 구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주를 통해 구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은 강한 자의식 아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척하며 주체적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BTS의 멤버 RM이 여러 점의 작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윤중식(1913~2012)의 작품에서 특히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난다.

재료비가 부족해 미군 천막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김태의 회화도 기증 덕분에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김태는 생선을 줄에 엮어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즐겨 그렸다. 생전에 그는 “어촌에서는 서당 수업료를 어물로 대신하곤 했다. 펴서 말리는 물고기가 새가 날아가듯 신기해 보였다”고 말했다.


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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