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내세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원스톱 솔루션’ 전략은 라이벌인 TSMC와 차별화 포인트를 시장에 보여주기 위한 승부수로 풀이된다. 자체 개발한 시스템반도체·패키징 공정과 TSMC에는 없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하나로 엮어 고객사의 비용 부담을 덜고 회사의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후면전력공급(BSPDN),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대화하는 광학 소자 등을 통해 경쟁사들과 기술 격차를 좁혀가는 동시에 미국 빅테크 등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을 내놓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이달 초부터 미국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들과 연쇄 회동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출장 일정을 마치며 “삼성의 강점을 살려 삼성답게 미래를 개척하자”고 거듭 강조했다.
12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개최된 ‘삼성 파운드리포럼 2024’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대목은 그동안 삼성이 거의 매년 공개했던 공정 로드맵 단축이 올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럼에 참가한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임직원들도 “공정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실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시장의 관심을 모았던 1.4㎚(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만 봐도 삼성은 기존 목표대로 2027년에 1.4나노 공정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TSMC가 ‘2026년 1.6나노 양산’ 전략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도 1.4나노 양산 시점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기존 계획을 재확인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1.4나노 적용 시점이 TSMC와 대등하지만 고객사가 원하는 모든 종류의 칩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차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TSMC와 달리 인공지능(AI) 메모리로 각광받는 HBM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TSMC나 인텔처럼 HBM 공급망관리(SCM)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생산 단가가 훨씬 저렴하고 칩 제조 시간도 짧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삼성전자는 원팀 솔루션과 공정 효율 강화를 통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파운드리 수요를 잡아나갈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AI 연계 매출과 고객사 수가 각각 1.8배, 2배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며 2028년에는 매출이 9.1배, 고객사는 4배 증가한다는 전망을 내놨다. 수요 증가에 맞춰 올해 3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웨이퍼 출하량 또한 2022년 대비 20배로 확대하고 한국은 물론 미 텍사스 테일러 공장을 통해 클린룸 면적도 넓히겠다고 발표했다.
미세화 공정과 별도로 파운드리 신기술도 대거 소개했다. 먼저 2027년까지 일명 실리콘 포토닉스로 불리는 광학 소자를 반도체 기판에 적용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반도체나 전자 기기 간의 신호 연결을 금속 선으로 했다면 이것을 빛으로 바꿔서 데이터 이동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2나노 공정에서는 BSPDN이 추가된 공정으로 2027년 생산을 목표로 한다. 후면에서 전력을 공급하면 전력과 신호의 병목을 개선해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이에 인텔은 2025년, TSMC는 2026년 BSPDN 공정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번 포럼에 앞서 미국을 보름 일정으로 방문한 이 회장은 잇달아 빅테크 거물들과 회동하며 파운드리 영업 최선봉에 섰다.
이 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메타와 아마존, 퀄컴 등 주요 빅테크 수장들을 연이어 만났다. 10일에는 미국 새너제이에 위치한 삼성 본사에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를 만나 AI 반도체와 차세대 통신칩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고 이어 11일에는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의 미국 팰로앨토 자택으로 초청받아 단독 회동했다. 저커버그 CEO가 방한했던 2월 당시 이 회장의 초대로 승지원에서 회동한 지 4개월 만이다. 12일에는 시애틀 아마존 본사를 찾아 앤디 재시 아마존 CEO를 만난 뒤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컴퓨팅 산업에 대한 시장 전망을 공유하고 추가 협력 분야를 모색했다. 회동 자리에는 전영현 DS부문 부회장과 이정배 메모리사업부 사장 등 반도체 사업 수장들도 동석했다. 이 회장은 이달 말 글로벌 전략회의를 열고 하반기 경영 전략을 점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