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능 스포츠카가 대로를 질주하며 커다란 굉음을 낼 때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소리를 내는 거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좋은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속도와 굉음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돌출적인 행동의 원인을 ‘거대 자아’의 폭발로 본다. 눈에 보이는 자아의 모습을 거대하게 부풀려 사실은 속상한 자아, 슬픈 자아, 스트레스로 가득한 자아를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또 다른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욕망의 대체재로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들은 반드시 힘겨운 투쟁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값비싼 스포츠카나 화려한 명품으로 ‘사실은 괜찮지 않은 나’를 감추려는 기획은 자아의 방어기제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나는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로버트 존슨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 안의 ‘아니마(영혼)’를 찾을 것을 주문한다. 과거의 미국 문화에서는 카우보이를 가장 씩씩한 남성의 상징으로 보았다면 현재 우리 문화에서는 슈퍼카를 소유한 ‘영앤리치’를 대단한 남성의 상징으로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성취만으로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이르는 길에 다다르지 못한다. 소비는 상품을 소유하는 것일 뿐 타인의 영혼과 진정으로 교감하는 길이 아니기에. 우리는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진솔하게 말할 대상을 찾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고 나다움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렇게 욕망의 무한질주를 향한 충동을 내려놓고 불안하지 않은 나, 타인을 보살피는 나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 바로 아니마다.
아니마는 존재의 높낮이나 권력보다는 관계의 따스함을 생각하는 지혜로움이다. 때로는 영화 ‘앤트맨’의 여주인공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없이 작아질 용기가 필요하다. ‘앤트맨’에서 재닛(미셸 파이퍼)은 폭탄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은 원자보다 더 작아져 현실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입자의 세계로 사라져버렸다. 이런 사랑, 이런 책임감, 이런 따스함이야말로 우리 안의 아니마가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세상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감으로 함께 존재하는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배우는 거대한 학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진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기를.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랑, 더 깊은 공감, 더 따스한 연대의 삶에 다다를지 고민할 수 있기를. 아니마는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기 쉬운 우리의 자아를 향해 따스한 위로의 손길을 보내준다. ‘나는 부족해’라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면 당신 안의 가장 깊고 따스한 아니마에게 길을 물어보기를. 당신은 분명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따스하고 사려 깊고 지혜로운 아니마를 이미 자기 안에 지니고 있을 터이니.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온 세상을 향해 선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