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목요일 아침에] 부러운 메르켈 과오 논쟁

메르켈, 타협·실용 리더십 강점에도

구조개혁 소홀해 독일 경제난 초래

우리는 정책능력 없이 사명감 과도

이성에 기반해 위기관리 리더 절실





최근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무티(Mutti·엄마) 신화’에 금이 가고 있다. 메르켈은 16년 재임 동안 엄마 같은 실용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을 프랑스가 넘볼 수 없는 경제 강국으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유럽연합(EU) 단합, 국제사회 리더십 등에서도 남다른 성과를 남겼다. 2016년 11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베를린을 방문해 정계에서 은퇴하려던 메르켈의 4선 도전을 설득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독일 경제가 삐거덕대면서 ‘여제(女帝)’의 약점과 과오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제조업 수출 중심의 독일 성장 모델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 경제의 둔화 등과 맞물려 한계에 봉착했다. 메르켈이 단기 성과에 매몰돼 노동·연금 등에서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미룬 탓이 크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메르켈이 주도했던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수입이 사실상 끊기면서 최악의 에너지난을 겪고 있다. 독일 내에서는 친중·친러 정책을 폈던 메르켈의 실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메르켈은 영웅적인 면모나 원대한 비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다. 사실 그는 연금·교육·노동·의료·기후변화 등 모든 국가 과제에 대해 전문가들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하지만 국민에게 헛된 미래 희망을 주기보다는 당면한 문제 해결과 관리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정책을 펴다가도 반발에 직면하면 쉽게 퇴각했다. 유권자들은 비전을 원하지만 급격한 변화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타협을 통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한 걸음씩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선택했다. 반대 세력들이 싸움을 걸면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그래도 말이 안 통하면 뒤로 물러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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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구별하지만 배제하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지만 선동하거나 남을 압살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남을 이간질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주의와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국민을 위해 봉사합니다.” 2018년 메르켈이 기독교민주연합 당 대표직을 내려놓을 때의 고별사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은 정반대다. 자신만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웅임을 자처한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고 편 가르기를 통해 정치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이후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경제 이론을 막무가내로 실험하면서 자영업 붕괴와 일자리 참사를 일으켰다. 이념 편향적인 정책에 원전 생태계는 무너졌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전문가들 의견은 무시됐고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구개발(R&D) 카르텔 적폐’를 척결한다면서 과학기술계를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결국 R&D 예산을 원상 복구했다. 의료 개혁에서도 방향은 옳지만 과단성만 있고 정교한 정책 능력이 부족한 탓에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상속세 등 세제 개편과 기업 밸류업을 위한 상법 개정 등 굵직한 정책들은 부처마다 의견이 달라 혼란스럽다.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은 오로지 권력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틈을 비집고 더불어민주당은 ‘기본소득’과 같은 돈 풀기 정책을 미래 비전이랍시고 내놓고 있다.

한국은 20세기 들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몇 안 되는 나라다. 그 성공의 결과물이 ‘87년 체제’다. 하지만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위기 징후를 보이는 가운데 보수와 진보 모두 기득권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와는 다른 유형의 능력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 출현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커지고 있다. 전망은 비관적이다. 진영 갈등이 격렬해지면서 합리적인 이성에 기반해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미래형 지도자는 설 자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여전히 구체적인 로드맵도 없이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며 사명감만 부르짖고 있다. 메르켈의 과오와 역사적 평가를 둘러싸고 한창 논쟁이 벌어지는 독일이 부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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