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연금 백만장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연금 체계도 사회보장연금(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3층으로 한국과 비슷하다. 이 가운데 퇴직연금으로 모은 자산이 100만 달러(약 13억 8000만 원)를 넘어선 사례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최대의 퇴직연금 플랜 운용사인 피델리티인베스트먼트가 자사 가입자를 대상으로 집계한 결과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인 401K 연금 자산이 100만 달러를 넘어선 이들이 1분기 말 기준 48만 5000명에 이르렀다. 연금 백만장자가 1년 전보다 무려 43% 늘었다는 것이다. 이들 연금 백만장자의 평균 나이는 59세, 평균 가입 기간은 26년, 평균 퇴직연금 자산은 158만 달러(약 21억 8040만 원)다. 회사와 자신이 낸 적립금으로 주식·채권·펀드 등에 투자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은퇴 천국’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제도는 겉으로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노후 보장 장치로서의 기능은 거의 마비돼 있다시피 하다.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은 물가 상승률조차 따라잡기도 버겁고 중도 인출과 해지가 다반사여서 연금 기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퇴직연금의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고작 1.94%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인 1.36%와 별반 차이가 없다. 수수료까지 감안하면 투자수익률이 물가 상승률을 밑도는 해도 적지 않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기금의 운용 수익률(7.63%)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은퇴한 후 퇴직연금을 연금 형태로 받는 가입자는 지난해 10.4%로 겨우 10% 선을 넘었을 정도다. 전세·주택 구입 자금 등의 용도로 중도에 인출하거나 이직할 때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로 받은 후 이어가지 않고 해지해 일시금으로 전액을 찾아 쓰는 게 대부분이다. 2012년 7월 이후 세워진 사업장은 퇴직연금 가입이 의무화돼 있지만 실제 가입한 사업장은 10곳 중 3곳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저조한 수익률 개선을 위해 지난해 미국처럼 DC형, IRP 가입자를 대상으로 가입자가 운용 방법을 지시하지 않더라도 사전에 약속한 방식대로 운용 회사가 운용할 수 있게 하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옵션 가입자의 90%가 은행 예금과 같은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했다. 위험성과 변동성이 높은 금융 상품에 투자했다가 자칫 원금마저 까먹을 위험이 있다고 보고 안정성에만 치중하다 보니 실효성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반면 보험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DC형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은 20년간(2001~2020년) 연평균 8.6%, 5년간(2016~2020년) 10.1%로 매우 높다.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의 20년, 5년 수익률도 각각 8.3%, 9.2%에 달한다. 캐나다·호주·스웨덴 등 주요 국가들의 퇴직연금 수익률 수준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은퇴 시점에 맞춰 자동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해주는 타깃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TDF) 등 고수익 상품에 적극적으로 투자되고 있는 영향이 크다. 세제 혜택 취소, 벌금 부과 부담 등으로 중도 인출도 많지 않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의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이 높은 것은 지속적으로 상승 추세를 이어가는 미국 증시 등을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진 영향이 클 것이다. 한국의 퇴직연금 투자자나 개인 투자자들도 미국 증권투자를 늘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퇴직연금 투자자들이 글로벌 경제와 기업의 변화를 예측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환 리스크와 복잡한 펀드·거래 수수료 등 감안해야 할 변수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보가 부족한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글로벌 투자 노하우가 풍부한 국민연금공단에 투자 운용을 맡길 수 있는 길을 터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퇴직연금 가입자가 직접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를 상대해 투자 상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신해 적립금을 관리·운용하면서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를 상대하게 하는 것이다. 1964~1974년에 태어난 945만 명의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올해부터 본격화한다. 더 늦기 전에 퇴직연금의 정상화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