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논란에 시달리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간) 재선 도전을 포기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전현직 대통령 간 ‘리턴매치’로 주목받던 미국 대선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바이든 대통령에서 해리스 부통령으로 교체되며 민주당 지지층 결집력이 강화하면서 ‘트럼프 대세론’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50대의 유색인종 여성이자 진보 정치인인 해리스 부통령이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지명돼 70대의 백인 남성이자 보수를 대표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맞붙을 경우 이번 대선은 인종·성별·세대·이념 대결로 확장, 세기의 이벤트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민주당 내 일각에서 ‘미니 경선’을 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해리스 대세론’을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으로 급속히 기울던 무게 추도 일단 원점으로 되돌려졌다는 분석이다. 워싱턴 정가와 정치 분석가들은 “그동안 당연시됐던 바이든 대 트럼프의 대선 구도와 전략이 한 번에 뒤집혔다”면서 “미 대선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날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발표 이후 의회 지도부와 각 주의 민주당 조직위에 지지를 요청하며 전광석화처럼 당내 장악에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 대선 캠프도 ‘해리스를 대통령으로’를 캠프 명칭으로 내걸었으며 민주당 전국위도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출마를 반영해 관련 서류를 변경해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에 제출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트럼프와 그의 극단적인 ‘프로젝트 2025’ 의제를 물리치기 위해 민주당과 우리나라를 통합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면서 “선거일까지 107일이 남았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고 이길 것”이라고 밝혔다.
대선이 불과 4개월도 남지 않은 만큼 민주당은 후보 교체를 위한 현실적 제약 등을 감안해 해리스 부통령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대권 잠룡’으로 평가되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조시 셔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비롯해 2020년 대선 경선에 도전했던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 등이 이날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공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또 민주당 내 영향력이 막강한 진보 코커스, 중도 좌파 신민주연합, 흑인 코커스 등 의원 모임도 모두 바이든 대통령 사퇴 후 신속하게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억만장자 ‘큰손’들과 소액 기부자들도 반색하면서 이날 하루에만 올해 대선 캠페인 이후 최대 규모인 6000만 달러 이상의 온라인 기부금이 걷혔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결단’으로 민주당 내부에 모처럼 안도감이 찾아왔지만 불확실성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해리스를 최종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할지를 두고 당이 또 한 번 흔들릴 수 있다. 주요 인사들이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등은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결정은 환영하면서도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지지 후보를 특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앞으로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게 될 것”이라는 묘한 성명을 남겼다.
당내에서는 ‘민주적인 절차’를 강조하며 경선을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NYT는 “바이든의 해리스 지지 이후 하루 만에 6000만 달러가 모금됐지만 그녀의 출마는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들의 욕구를 시험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2020년 민주당 경선 당시 유권자들이 결집한 것은 ‘바이든이 트럼프에 맞설 가장 안전한 선택지’로 보였기 때문이지만 흑인·여성·아시아계라는 이력의 해리스가 당 지지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중도 백인 표가 이탈할 수 있다는 우려에 당에서 러닝메이트로 백인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해리스로의 후보 승계가 아닌 경쟁적인 지명 절차(경선)을 치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당장 ‘바이든 리스크’에서 벗어난 민주당으로서는 다음 달 예정된 전당대회까지 새 후보 띄우기로 관심 몰이가 가능할 수 있다. 다만, 대선까지 4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후보 선정을 둘러싼 경쟁과 내홍이 심화할수록 당초 기대했던 지지층 결집이 멀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이번 대선에서 ‘해리스-트럼프’ 맞대결이 유력해진 가운데 양측의 대결 구도가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그대로 반영할 만큼 첨예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NYT는 “59세의 해리스 대선 후보 지명은 78세의 트럼프에게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면서 “트럼프는 자신보다 수십 년 젊고 바이든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민주당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인 여성의 낙태권 문제를 다루는 데 능숙한 후보와 경쟁해야 한다”고 짚었다.
젊은 해리스 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게 되면 향후 TV 토론 등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고령이 상대적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며 나아가 해리스 부통령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번 대선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힐러리 클린턴’ 승부 이후 8년 만에 남녀 대결로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해리스 부통령이 아프리카계 및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점도 트럼프 전 대통령과 확연히 대비되는 대목인데 공화당의 경우 정부통령 후보 모두 백인 남성인 만큼 인종적 확장성이 떨어진다.
아울러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범죄를 저질러 유죄 평결을 받았고 해리스 부통령은 검사 출신에 청문회 스타라는 점도 주목을 끄는 지점이다. 법조인 출신으로 날카로운 언변을 갖춘 해리스 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직에 맞지 않는 사람을 뽑아 미국이 누더기로 전락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미 정치권에서는 해리스 부통령의 진짜 경쟁력은 피부색이나 성별이 아니라 전투력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 캠프는 그러나 일찌감치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가능성에 대비하며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슈퍼팩 마가(MAGA)는 이날 새로운 광고를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해리스가 바이든의 정신적 문제를 은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트럼프 캠프 측은 또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 일원으로서 불법 이민 문제를 방치했으며 인플레이션에도 책임이 크다는 주장을 펼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CNN과의 통화에서 “해리스를 바이든보다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최근까지 진행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박빙의 열세를 보이고 있다. 의회 전문 매체 더힐이 이날 최근 67개 여론조사를 종합 분석한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47.4%, 해리스 부통령은 45.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최근 급변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향후 1~2주 내 나올 여론조사가 해리스 부통령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있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