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강행으로 원자력발전 생태계가 상당히 훼손됐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도 차세대 원전 생태계는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올해 큰 폭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대학·정부출연연구원·기업 등의 R&D 생태계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집권 세력이 과학기술에 대해 정치·이념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원전 생태계 복원이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구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회장인 송철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교수는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최근 체코에서 24조 원 규모의 원전 건설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데 대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4기 수주에 이은 쾌거”라면서도 “하지만 지난 정부에 이어 여전히 4세대 원전 신기술 개발 지원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 원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빌 게이츠 등이 투자한 테라파워 등과 유사한 4세대 원전 연구를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국가 과학기술 정책에서 본질적 혁신보다 이벤트성이 많다”며 “선진형 과학기술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도 진전이 없다”고 꼬집었다.
-최근 우리나라가 체코의 원전 2기 건설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는데.
△이번 APR1000 원전(1000㎿e 용량)은 한국의 기본 모델인 APR1400 원전의 용량을 체코 실정에 맞게 줄인 것이다. 미국·일본·프랑스·한국처럼 전력망이 큰 곳은 원전 용량이 클수록 좋지만 체코는 전력 수요가 한국의 15% 선으로 공급 용량이 좀 작은 게 유리하다. 1992년부터 9년 동안 APR1400 원전 R&D에 참여했던 연구자로서 참 감개무량하다.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5년 만의 큰 경사다. 현재 5대 원전 강국은 미국·프랑스·한국·중국·러시아 등이다. 이 가운데 체코가 속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같은 서방에서는 중국·러시아 원전 도입을 경계한다. 우리나라는 이번 수주전에서 막판까지 경합한 프랑스와 비교해 가격은 절반, 공기는 절반 또는 3분의 1에 원전을 건설할 수 있다. 예산 내 적기 시공(On Time On Budget)이 한국의 특징이다. 내년 3월 체코 원전을 계약해 2038년 상업운전에 들어가도록 건설할 예정이다.
-체코 원전이 저가 수주라는 오해도 있는 듯하다.
△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한 팀코리아는 서플라이 체인 측면에서 가격과 기술 경쟁력이 높다. 현 정부 들어 재개된 신한울 3·4호기 건설 계획에는 기당 약 5조~6조 원의 예산이 잡혀 있다. 체코 원전은 물가 급등 속에서 현지 자재 60% 사용과 현지 노동력 활용 등의 여러 조건이 고려돼 더 높은 가격으로 책정됐을 것이다. 올 3월 4호기 상업운전에 들어간 바라카 원전 수주 당시에도 덤핑 입찰 얘기가 나왔었지만 팀코리아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무리할 이유가 없다. 체코 원전 수주액 24조 원은 건설 관련 초기 비용이고 앞으로 운영비, 핵연료 사업까지 놓고 보면 그 규모가 커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분절, 탄소 중립, 인공지능(AI)·디지털 대전환으로 인해 여러 나라에서 원전이 부활하고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 원전을 멀리했으나 지금은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AI·디지털 대전환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들은 러시아에서 가스를 수입하지 못하고 있다. 체코의 경우 러시아형 원전 6기를 보유 중인데 이번에 두코바니에 2기 건설을, 추가로 5년 내 테멜린에 2기 건설을 결정할 예정이다.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로 우리 원전을 수출하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원전 수출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는.
△APR1400 모델은 이미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설계인증을 획득해 수출에 지장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해외에 원전을 건설할 때 미국의 수출 통제 요건을 감안해 미국과 원자력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2010년대 후반 사우디아라비아에 소형모듈원전(SMR)의 원조 격인 스마트(SMART) 원자로 건설을 논의하다가 중단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까지도 미국과 사우디가 원자력 협정을 맺지 못한 점이 한국의 현지 원전 건설 진척에 장애가 되고 있다. 또 체코 등 각국의 원자력 규제 체계를 파악하고 EU 녹색분류체계 요건에 부합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사용후핵연료와 같은 고준위 폐기물 관리 대책도 조속히 준비해야 한다. 특히 국내 원전 공급 생태계의 조기 재건과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 탄소 중립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므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의 균형도 찾아야 한다.
-차세대 원전 개발에 대한 정부의 R&D 지원은 잘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330㎿e 규모의 스마트 원자로 개발에 들어가 2012년 국내 설계 인가를 마쳤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관심을 갖고 스마트 원자로 실증을 추진했으나 정부 내 이견으로 인해 아쉽게도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스마트 원자로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결국 해외로 나가지 못했다. 300㎿e 이하 규모의 차세대 원전인 SMR은 경수로 기반으로 물을 냉각재로 쓰는 3.5세대와 헬륨·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4세대로 나뉜다. 하지만 현재도 4세대 신기술 연구를 위한 지원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전(前)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기술 개발과 우수 인력 육성·유입이 중단됐던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오래전부터 해온 4세대 SMR 연구도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2030년대 상업화가 목표이지만 미리 준비해야 한다. 테라파워는 일단 2029년 미국 와이오밍주의 300㎿e 규모 석탄발전소를 SMR로 대체할 계획이다. 다만 인허가 문제 등으로 인해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원전 5대 강국 등은 80~90개의 SMR을 개발 중인데 대부분 4세대에 속한다.
-2050년 탄소 중립 목표와 관련해 원전까지 포함하는 ‘CFE(Carbon Free Energy) 100’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는 기후변화 대처뿐 아니라 유럽 등의 친환경 보호무역 강화에 대처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다만 기업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신재생에너지 100%로 하겠다는 RE100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가운데 국제원자력기구(IAEA),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원자력기구(NEA)에 이어 올 2월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원자력 에너지의 청정에너지 속성을 인정했다. 그동안 RE100이 대세였으나 구글 등 기업들과 공공 부문에서 CFE100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말 구글 환경 보고서를 보면 자사의 청정 전력 확보 전략을 RE100에서 CFE100으로 변경했다. 공급의 안정성과 경제성을 갖춰야 에너지 안보를 꾀할 수 있다.
-CFE100을 달성하려면 원전 R&D를 꾸준히 추진해야 할 텐데.
△우리 원전의 기본 모델인 APR1400은 1992년부터 9년 동안 개발됐다. 중간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가 왔으나 추진 계획과 예산 규모가 유지됐다. 그 기간 연구 수행 주체와 평가 조직이 그대로 지속되며 변함없는 지원이 이뤄졌다. 이 원전을 모델로 국내와 UAE에서 각각 4기가 상업운전 중이고 신한울 3·4호기 2기가 건설 중이며 추가로 3기가 건설될 예정이다. 하지만 전 정부에서 신재생에너지를 키운다며 탈원전을 시도해 원전 생태계가 훼손됐고 지금도 다 복구되지 않았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관건이다.
△일본은 2021년 과학기술기본법을 과학기술혁신기본법으로 개정해 과학기술의 범위와 진흥 대상을 확대했다. 우리나라도 과학기술기본법을 개정해 선진형 R&D 체계와 연구 성과 상용화 촉진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선진형 R&D 철학을 담아야 한다. 연구자의 자율적 의사 결정을 담은 영국의 홀데인 원칙, 연구 주제 선정과 재원 배분을 연구자에게 위임하는 독일의 하르나크 원칙, 연구자의 독립성·안정성·지적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의 버니바 부시 원칙을 예로 들 수 있다.
-출연연을 포함한 공공 과학기술 혁신이 필요하다.
△12대 국가전략기술의 50대 과제를 달성하려면 출연연 등 공공 R&D가 임무 중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말은 무성하지만 실제 혁신이 이뤄지기에는 장애물이 많다. 출연연에서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성과주의예산제도(PBS) 개혁이라든지 R&D 현장의 선순환을 저해하는 법·제도와 관료적 지원 체계 혁신, 효율성 위주의 재정운용 정책 타파 등이 필요하다. 출연연이 산업화 촉진자(패스트 팔로어)에서 과학기술 혁신의 선도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He is…
195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자력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근무하며 원자력안전연구본부장·열수력안전연구부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영년직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어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UIUC) 연구교수와 프랑스 원자력연구소 방문연구원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