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 퇴근이 특별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정시 퇴근이 특별하고 소중하다. 정시 퇴근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 국민들은 정시 퇴근을 ‘칼퇴’라는 명칭으로 칭송한다. 무사히 칼퇴에 성공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하다. 대한민국, 특히 수도권의 통근 시간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긴 편이다. 7시가 훌쩍 넘어 집에 들어가면 이미 기진맥진. 밥 먹고 청소라도 하려면 벌써 잘 시간이다. 아이를 낳고 돌볼 시간이 도무지 잘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을 결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 5월 발표된 ‘결혼·출산·양육 인식조사’에서 ‘근무시간이 줄고 육아시간이 주어진다면 출산 의향이 늘어나느냐’는 질문에 긍정으로 답한 비율은 85.2%에 달했다.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83.2%)’ ‘정부의 육아수당이 늘어난다면(81.9%)’보다 ‘육아시간의 확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초저출산은 늦은 퇴근 문화, 긴 통근 시간, 맞벌이 부부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집안일로 인한 시간 부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봐도 되겠다.
바꿔 말하면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부부에게 최소한의 ‘육아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칼퇴’라는 말이 생긴 데서도 유추할 수 있듯 우리나라의 평균 노동시간은 매우 긴 편이다. 202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근로시간은 네 번째로 길고 노동생산성은 다섯 번째로 낮다. 그야말로 시간이 곧 생산성이라 믿는 비효율적인 근로 문화다.
물론 당장 근로시간을 파격적으로 줄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근로 환경을 되짚어볼 필요는 있다. 우리나라는 장시간 근로와 경직적 근로를 기저에 깔고 있다. ‘9 to 6’로 대표되는 획일화된 근무시간을 유지한다. 일을 잘 마치더라도 6시에 퇴근을 하려면 윗사람 눈치도 살펴야 한다. 퇴근도 이렇게 어려운데 육아휴직과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당당하게 쓸 수 있겠나. 정시 퇴근, 유급휴가나 연차 사용 같은 일상적인 일터 문화부터 다듬어야 한다. 합계출산율 1.3~1.7명을 유지하는 유럽 국가는 근로시간을 줄이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결국 저출산 해결의 핵심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고, 근로 문화가 변해야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다.
육아휴직, 근로시간 단축 같은 제도가 꼭 필요하고 종일반 어린이집, 늘봄학교 등 보육과 교육 제도도 아주 긴요하지만 ‘칼퇴’가 당연히 되는 문화가 우선이다. 부모가 마음 편히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귀중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없는데 아이를 낳으라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이와 같이 저녁을 먹고, 산책과 놀이를 하고, 자기 전까지 뒹구는 소소한 일상이 보장돼야 자녀를 낳고 키우는 선택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