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독일 서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의 한 주택가. 가로로 길게 늘어선 주택 사이로 각종 중장비가 쉴 새 없이 오갔다. 철판을 절단하는 소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신호수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이동을 연신 통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도 베를린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380㎸급 전력망 지중화 공사가 한창이다. 샤를로텐부르크 변전소는 초고압 전력 대동맥을 잇는 경동맥 중 하나로 최대 30m의 암반을 뚫고 공사를 하고 있다. 지역 난방유 공급 업체의 한 직원은 “베를린시 지하에 전력망 고속도로가 뚫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를린시 외곽의 48만 ㎡ 규모의 옛 테겔공항도 지역 송배전 업체인 스튜롬네츠베를린이 6㎸ 규모의 전력망 보수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테겔공항은 2차 세계대전 때 군공항으로 쓰였던 곳이다. 베를린 주 정부 관계자는 “테겔공항 부지에 대학과 정보기술(IT) 기업을 유치해 새로운 경제 단지로 탈바꿈할 방침”이라며 “그 전에 전력망부터 손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전력망 선진국이다. 독일 경제기후부에 따르면 현재 독일 전력망 총연장은 3만 7000여 ㎞에 달한다. 지구 둘레(4만 ㎞)와 비슷하다. 현재 진행 중인 전력망 프로젝트만 총 119개로 길이는 1만 4002㎞에 이른다. ‘관료주의적(burokratisch)’이라는 평가를 받는 독일이 전력망 확충만큼은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이 전력망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에너지 공급 확대가 국가 생존과 연관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주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증가로 전력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독일 내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은 2037년 연 88.4TWh(테라와트시)로 2022년 총전력 사용량(490TWh)의 20%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독일의 경우 2022년 탈원전을 결의하고 마지막 남은 원전마저 가동을 중단한 뒤로는 계통망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 80%까지 올리고 2045년 탄소 배출량을 ‘0’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구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위기를 맞은 상태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는 신규 발전 시설을 대폭 늘리고 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전력망도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다. 전력망 구축 지연에 따른 에너지 부족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구체적인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독일은 시민사회가 성숙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사회 인프라 구축과 관련 주민 수용성 문제는 여전히 난제이기 때문이다. 혐오 시설과 소음·오염을 유발하는 장치에 대한 지역 거부감은 독일에서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역의 기차 선로를 구축하는 사업은 당초 목표보다 30년 이상 지체되기도 했다.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역 주민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전력망 구축과 관련해 주민 참여를 높이고 투명성을 강화하고 있다. 송전선 확충 계획과 인허가 전부터 주민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설명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주민 다수의 의사를 우선 반영하는 방안도 제도적으로 명시했다. 토지 소유주와 송전망 사업자가 특별한 사유 없이 공사를 지연시키는 경우에는 벌금을 부과하고 토지 소유주가 원활히 협조하는 경우 더 높은 보상금을 주도록 하는 사업 활성화 법을 신설했다.
사업자를 위한 패스트트랙 절차도 구축했다. 2011년 제정된 전력망구축촉진법(NABEG)은 16개 주 내에서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전력망 수립 계획을 연방정부로 일원화해 절차를 간소화한 게 특징이다. 이후 법 개정을 통해 전력망 수립 계획에서 허가까지 4년 안에 이뤄지도록 기한을 설정했고 미미한 경로 변경일 경우 환경영향평가를 생략해 사업 속도를 높였다. 독일 연방네트워크청 관계자는 “NABEG를 통해 연방네트워크청이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면서 독일 내 전력망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 가파르게 증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